본문 바로가기

자아

스트레스가 심할 때 스트레스가 극도로 심해서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속으로 외면 순간적으로 괜찮아진다.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을 회피하는 게 아니다. 그리 해악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왜냐면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할 뿐이다. 더보기
2011년 10월 10일 크고 작게 반복해서 일어나는 패턴이 있다. 목표를 잡거나 일을 맡는다. 그 일에 시간을 쓰고 에너지를 쓰고 몸을 쓰지만 생각만큼 결과는 안 나온다. 여기서 '생각만큼'의 생각, 즉, 나에 대한 기대는 나의 능력보다 높다. 그래서 언제나 버겁다. 나의 깜냥을 고려하지 않은 일의 선택, 진로의 선택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마저 못하게 막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전이 참 더뎌보이니까. 더보기
경계인 왜 나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됐을까.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일까. 언제나 가지 않은 길을 후회하는 성격 때문일까. 경계인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어딜가나 경계인이 되는 성향의 사람이 있을까. 나는 항상 '지금 여기' 없다. 더보기
약점 가리고 싶었던 내 약점이 드러나면 하루종일 부끄러운 그 순간이 떠올라 괴롭힌다. 상대방은 별로 염두치 않더라도 진짜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기에 시름거린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듯이 툭하고 완벽히 보이려는 욕망을 놓아버리고 싶다. 그러면 마음이 지복의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별 일 아닌 일에만 가능하다. 드러내고 싶었던 장점을 약점보다 먼저 보일 수 있으면 약점이 드러나고도 마음이 편한데 약점이 먼저 드러나면 장점을 보여줘야 된다는 부담감에 더 일을 망친다. 자신을 보여줘야하는 경연장에서 혼자 사투를 벌이는 것 같다. 이게 누구탓인지 모른다는 사실이 제일 답답하다. 더보기
"선택의 누적분이 자신이다" "선택의 누적분이 자신이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작년 인물과 사상 월간호의 표지 제목 중 하나였다. 김어준이 인터뷰 중 한 말이다. 처음에는 선택의 누적분은 '자산'이라고 오독 하였다. 그래서 그저 그런 내용의 얘기겠구나 싶었지만 제대로 읽고 나서는 생각이 멈출 정도의 충격을 느꼈다. 내가 한 선택이 곧 내 자신이다 김어준의 이 한마디는 반박할 수 없는 명제다. 갈림길에서의 수많은 선택, 사소한 선택부터 지류를 바꾼 커다란 선택까지, 그 무수한 선택들이 곧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아니 그 자체가 곧 나다. 그 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하는 후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순간 순간은 불가항력적이고 실수에 의한 선택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선택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나는 나를 가장 잘 반영한.. 더보기
오늘도 찾아온 '탈개인화(depersonalization)' 오늘도 그 순간이 찾아왔다. 그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실연하는 연극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배우처럼 순간 멍해진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게 하나의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떻게든 지금 이 난관을 눈 앞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기계적인 행동을 한 번 더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초 정도 그 상태가 지속된 뒤 안정된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습관과 지각들이 낯설어지는 순간 나는 극도의 우울감을 경험한다. 내가 실제라고 믿고 있던 것들이 다 꿈이라는 것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것이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 명상이라고 생각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 더보기
낙서 같은 정체성 온몸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금까지의 세월은 내 몸의 각질 속에 새겨져 있다. 각질이 아무리 떨어져나가도 속에 남아 있는 그런 문신처럼 '나'는 만들어진다. 그 정체성은 문신처럼 일종의 흉터인데, 흉터를 가리기 위해 그 위에 색을 입혔다고 할까. 그렇게 생성된 정체성은 레이저로도 제거할 수 없다. 그 흉터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 들어갔을 때라야 없앴을 수 있다. 또 다른 흉터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문신과 달리 화려한 모양을 자랑하지 않는다. 맥락도 없다. 지저분한 낙서같은. 그래서 누가 "너의 정체가 뭐야."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말없이 옷을 벗어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옷이라는 또 하나의 색을 입힌 헝겊으로 낙서같은 정체성을 가리고 다닌다. 더보기
군에서의 계급연기 아래 글은 군에서의 계급에 너무 몰입해서 자신이 실제로 높은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쓴 글이다. 그런데 너무 공격적인 글이 될까봐 염려한 나머지 글 내용은 반대가 되버렸다. 항상 이런 식이다. ::::::::::::::::::::::::::::::::::::::::::::::::::::::::::::::::::::::::::::::::::::::::::::::::::::::::::::::::::::::::::::::::::::::::::::::::::::::::::::: 각자가 신병으로 들어왔을 때 기억나십니까? 사회에서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KTA에서의 겉멋도 털어버리고, 자대에 왔을 때 기억하십니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꽁꽁 얼은 듯한 모습 아니었습니까. 신병 기간 동안은 누.. 더보기
사진이 기억을 독재하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기억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자신의 변하는 모습이란 상상할 수 없었고, 화가에게 그림을 맡길 수 있는 귀족들이나 늙어가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역치 이하의 변화되는 이미지는 기억이 담아내지 못했다.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뿌연 꿈 속의 장면이 되었다. 대신 기억은 공정했다. 인상적인 장면은 기억에 오래 남고, 일상적인 일은 추상적인 기억으로, 의미없는 시간들은 망각의 배수구로 빨려나갔다. 첫경험, 충격정도, 감정상태, 그 일의 중요성, 당시의 신경생리상태, 기억의 회상 횟수, 연상의 용이함 등에 따라 기억의 선명함은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진의 기억 독재 속에 살고 있다. 사진의 그 완벽한 선명성은 어떤 기억도 뛰어 넘을 수 없다. 사.. 더보기
인과론과 도덕적 심판의 충돌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동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도덕적 심판의 당위성과 충돌해왔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뇌 속의 생리적이고, 전기적인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생긴다면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감쪽같이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선택의 순간에서 고민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한 가지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자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 자아에 '영혼'이라는 신성해 보이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정신'이라는 육체와 구분하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보던 희뿌연 영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자아라는 것은 '나'라고 느끼는 그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실제로 느.. 더보기
8p 언젠간 나는 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거울을 통해 뒤집어진 내 모습을 보았고, 녹음기를 통해 왜곡되지 않은 내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난 아직 나를 만나지 못했다. 나와 닮은 사람과 지내며 나는 내가 타인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고, 타인의 판단섞인 어투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 나를 만나지 못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다운타운에선 고요를 알 수 없듯이, 중력을 벗어날 수 없는 지구위에선 자유를 알 수 없듯이, 수많은 사람들과 생각 속에 떠다니는 나는 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난 언젠간 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날이 빛을 따라가는 날이 될지라도. 7. 8. 2005 더보기
가끔씩 (2003년 4월 10일 작성) 지금 움직이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거울에 보이는 게 나라는 사실에 ...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영혼이 육체를 보고 놀라고. 육체가 영혼을 느끼고 놀란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그 가끔의 시각에 나를 찾게 될 땐 사실 나란 놈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단 걸 알게 된다. 더보기
판단의 원칙: 고통 최소화의 길 아래 글은 대학교 3학년 때 '실용논리' 수업 과제로 썼던 글이다. 과제의 주제는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가, 말것인가.' 였다. 진부한 주제이긴 했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쓰길 바랬던 소흥렬 교수님에게 쓰는 글이었기에 생각의 흐름을 타는 동안 즐거울 따름이었다. 나 혼자 너무 나갔던지, 안락사에 대한 얘기는 않고, 다른 얘기만 90%를 쓰고, 마지막에 달랑 10%만 할애하여 안락사에 관한 결론을 내렸다. 그도 그럴것이, 안락사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이미 자아를 부정한 상태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내겐 우선이었다. 안락사에 대한 마지막 꼬리는 떼 버리고, 그 앞까지 잘라서 붙인다. 처음 주제를 받았을 때,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문제와 결부되는 면이 있어.. 더보기
자아 내 모습을 내 눈을 통해 직접 바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더보기
당신은 당신의 '자유의지'를 확신할 수 있습니까? ① 의식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노력은 희랍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전히 정확한 실체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중론에 따르면 의식을 뉴런들이 일시적으로 집합체를 만들며 반응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근거는 의식이 조금 더 뚜렷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 즉 평상시 상태나 의식적인 일을 하는 상태에서는 이 집합체의 크기가 커지며, 의식이 떨어진 상태, 꿈을 꾸거나, 환각상태일 때는 이 집합체의 크기가 작게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반응을 보내는 부분 영역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들이 얼마나 집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느냐이다. 즉, 설사 전체 양을 합하면 더 넓은 부분에서 신호가 나오더라도, 그것들이 고립된 섬처럼 떨어져 있으면, 의식의 정도가 약하게 된다. 의식은 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