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의지와 행동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도덕적 심판의 당위성과 충돌해왔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뇌 속의 생리적이고, 전기적인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생긴다면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감쪽같이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선택의 순간에서 고민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한 가지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자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 자아에 '영혼'이라는 신성해 보이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정신'이라는 육체와 구분하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보던 희뿌연 영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자아라는 것은 '나'라고 느끼는 그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실제로 느끼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자아에 의한 '자유의지'가 있는가, 즉,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영혼이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간다.
(참고: 당신은 당신의 '자유의지'를 확신할 수 있습니까? ①)
그런데 설사 자아에 의한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판단에는 문제가 없다. 의식 할 수 없는 뇌가 미리 내린 결정을 자아가 단순히 인지한다고 하자. 그럼 우리의 행동은 자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낄 수 없는 무의식에서 미리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행동은 개개인의 뇌가 내린 결정이고, 거기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물을 수 있다. 뇌와 자아를 구분할 것 없이, 영혼과 뇌를 구분할 것 없이 뇌 그 자체가 모든 것을 관할 하기 때문이다.
쟁점은 뇌가 결정'하는' 것이냐, 결정'되는' 것이냐다.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뇌가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 정말로 '선택'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냐가 미지수다. 이건 양자역학에서 정말로 입자가 확률대로 퍼져 있느냐, 아니면 미리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냐를 묻는 것과 같다. 우리의 뇌 안의 전자의 움직임도 당연히 양자 역학을 따를 것이고, 양자 역학이 말하는 확률론적 세계에 따라 당연히 우리도 똑같은 조건에서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자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선택'이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선택',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논쟁이 쓸모가 없는 것이 지성을 가진 생물체(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뇌 속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마이크로 적인 현상을 '의지'와 결부시켜 유의미한 실험적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양자적인 효과가 불확정적인 뉴런 점화 패턴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인 걸로 아는데, 기억나지 않는 어느 책에서 양자적인 효과가 뇌 속에서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다.)
굳이 양자역학까지 안 가도 된다. 유전적, 환경적, 생리적인 조건만으로도 사람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완전히 밝혀낼 순 없을 것이다. 행동의 예측에 어느 정도의 오차는 생기기 마련이고, 이 측정오차, 혹은 측정할 수조차 없는 원인으로 생긴 오차 때문에 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결과물을 내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오차를 '자유의지'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모든 행동은 원인에 의한 결과물일 뿐이다'라는 기본 생각 위에 있기 때문에 역시나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라고 명명할 수 없다.
과학(실험)이 완벽할 수 없어서 도덕적 판단의 당위성을 입증하지도 반증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저자 스티븐 핑거는 이 책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 놓는다.
-스티븐 핑거, '마음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99-100 페이지, 도서출판 소소
자유의지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허탈함을 느끼는 것마저 결정되어 있었다. 어떤 도덕적 판단도 할 수 없고, 어떤 판결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든 생존을 이유로 도덕적 판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하도록 진화해왔고, 설사 우리가 스스로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진화된 뇌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상황과 뇌의 생리적 상태와 살아온 경험과 기억에 의해 판단에 제약을 받지만, 근사적으로 자유의지로 선택한다고 여길 수 있다. 우리는 개개인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얌체 같은 사람이 있고, 남에게 많이 베푸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베푼 만큼 받으려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베풀지 않고 자기한텐 왜 베풀어주지 않느냐고 성을 내는 사람도 있다. 만약 그 성향이 유전자와 자라온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유전자나 환경의 영향을 인지할 수 있는 조건에서, 미약하나마 노력으로 개선이 가능하다. (설사 그 노력에 의한 개선마저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충분히 유의미한 '자유의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실 마이크로한 모든 판단까지 결정되어 있다면 이것 또한 무의미하지만, 어느 한 쪽은 반드시 포기해야지 '과학'과 '도덕'을 화해시킬 수 있다.
과학과 도덕의 화해는 각각의 '이상(理想)'에서 현실적인 제약을 보완하여 달성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적 이상: 모든 행동에는 유전적, 환경적, 생리학적 원인이 있다.
를 바탕으로 완벽하지 못한 분석으로 말미암은 오차를 '자유의지'로 대치시킨 것이고,
둘째는
윤리적 이상: 모든 행동은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된다.
를 바탕으로 유전적, 환경적, 생리학적 조건이라는 현실에서의 '오차'를 '정상참작'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이 이미 결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양자효과가 영향을 미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완전히 예측할 수 없으며 결국 여러 가지 가능한 행동을 확률적, 통계적으로 예측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는 세상과 인간의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가정해야 한다. 만약 진짜로 모든 게 결정되어 있다고 하면 어차피 결정되어 있기에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된다.
법에서의 판결과 도덕적 판단을 위해서는 도덕적 이상의 관점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 제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사람에게는 과학적 이상의 관점에 있어야 한다.
가슴 아프지만 2003년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참사를 돌아보자. 한 사람의 과오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분신방화를 한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법적인 처벌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지탄도 받아 마땅하다. 어떤 어려운 삶을 살았든, 자신과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죽이려고 한 건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그 개인에 대한 판단은 도덕적 이상의 관점에서 법과 도덕이 해야 한다.
그러나 제도를 만들고 사회 구조를 도안하는 사람들은 그 '개인'을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어떤 이'로 설정해야 한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떤 사회 구조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사회보장이 잘 된 국가에서도 그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물론 사람마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하지만, 통계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제도의 책임이다. 제도를 만드는 사람은 모든 행동에는 사회구조적, 환경적 원인이 있다는 가정하에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우리는 도덕과 과학을 동시에 만족하게 할 수 있는 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과론에 따른 과학은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그리고 뇌과학은 '선택'을 우리의 '자아'가 하는 것은 최소한 아니라는 증거물들을 내놓고 있다. 양자역학의 효과가 자유의지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이는 확인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두 관점을 적당히 양보시키면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면 인문학, 사회학이 의미가 없어지며, 사회의 진보를 위한 노력도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과학적인 접근(인과론)이 없다면 진보를 위한 노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학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의 판단은 도덕적 이상(자유의지)을 바탕으로 인과론의 보완이 필요하다. 한 사회의 범죄를 볼 때는 과학적 이상을 바탕으로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려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