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대학교 3학년 때 '실용논리' 수업 과제로 썼던 글이다.
과제의 주제는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가, 말것인가.' 였다. 진부한 주제이긴 했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쓰길 바랬던 소흥렬 교수님에게 쓰는 글이었기에 생각의 흐름을 타는 동안 즐거울 따름이었다.
나 혼자 너무 나갔던지, 안락사에 대한 얘기는 않고, 다른 얘기만 90%를 쓰고, 마지막에 달랑 10%만 할애하여 안락사에 관한 결론을 내렸다. 그도 그럴것이, 안락사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이미 자아를 부정한 상태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내겐 우선이었다.
안락사에 대한 마지막 꼬리는 떼 버리고, 그 앞까지 잘라서 붙인다.
처음 주제를 받았을 때, 평소에 나를 괴롭히던 문제와 결부되는 면이 있어 잘 됐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횡설수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안락사에 대해 글을 쓰겠지만, 그 전에 우선 나에게 사명감처럼 다가온 명제에 대해 먼저 말하려고 한다. 그 부분이 길어지더라도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그럼 두서없는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나는 누구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그 두려움이 고통이 되어 나를 괴롭혔고,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그런 경험이 없지만 나에게 가까운 사람이 나보다 세상을 먼저 뜨게 되면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왜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으면 나의 존재는, 나의 자아는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도 우주는 살아있을까. 그렇다 분명 살아있을 것이다. 내 속의 우주는 완전히 소멸하지만, 객관적 우주는 살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사라지면 우주도 사라질 것만 같다. 아니 반대로 내가 죽어도, 우주가 망해도 나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죽음에 대한 고민과 회의가 끝없이 나를 괴롭혔다.
죽음에 대한 회의는 삶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왜 죽을 생명이 태어나는가. 왜 무에서 유가 되었다 다시 무로 돌아가는가. 나는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란 회의가 들었다.
근래에 과학자들은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이론들을 쏟아냈다. 무생물에서 생물로의 전이는 분명 엄청난 점프이다.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변화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 중 내가 받아들였고, 내 생각과 일치한 이론이 있다. 바로 자기 조직화이다. 어떻게 자기 조직화를 통해 생명의 탄생이 가능한가. 개체들의 수나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의 수가 임계 수치를 넘어서게 되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촉매 할 수 있는 자기 촉매 현상이 나타난다. 자기촉매 현상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 하며 유지 할 수 있으며, 이는 수학적으로 쉽게 도출된다. 아마도 태초의 생명은, 그것이 RNA든 아미노산이든, 이러한 자기촉매현상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한 생명은 더 높은 단계의 자기조직화와 그 흔하게 들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해왔다. 스스로의 존재의 확실성을 높여 온 것이다.
기상예보에 태풍 소식을 보다가 문득 저 태풍은 정말로 살아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위적인 공기흐름에서 태풍은 분명 혼돈 속의 질서이다. 남태평양에서 태어난 태풍은 한 일생을 거친 후, 점점 쇠약해지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태풍은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와 차이가 없다. 태풍 또한 임계치 이상의 개체와 그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위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흡수 배출하며 자기 자신을 유지하다가 소멸한다. 물론 인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상호작용이 단순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그럼 태풍 또한 살아있는 것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태풍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존재하고, 이성도 존재하며, 내가 주위 환경과 주고받는 상호작용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나’라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내가 욕망을 느낄 때, 거기에는 욕망을 느끼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가 존재한다.
다시 생명의 진화로 넘어가자. 우여곡절 끝에 진화한 미생물들은 다시 진화를 거듭하며,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왔다. 생체가 단세포에 비해 매우 많이 진화했을 때, 생존에 있어 결정적으로 유리한 감각 하나가 생긴다. 바로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생명체는 고통이 있는 생명체와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고등 생명체 중 고통을 못 느끼는 생명은 없다. 그리고 또 새로운 감정이 탄생한다. 바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 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단연 진화 과정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감정이 등장한다. 이종교배를 위한 쾌락이다. 이종교배라는 강력한 무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만큼 강력한 성적 쾌락이 필요했다. 정리하면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 한 뒤로,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쾌락이 탄생했다. 포유류와 인간까지 와서는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다양한 감정들과 이성까지 탄생했다. 그 과정은 생체적인 통제인 DNA를 뛰어 넘어 전체의 시스템을 관장하는 뇌가 탄생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진화는 주위의 환경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뇌라는 산물을 만들어낸다. 이 뇌는 결국 내가 살아있다는 ‘자아 의식’ 마저 만든다.
이 ‘자의식’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물리며, 내가 죽어도 계속 살아 있을 것 같은 영혼불멸의 공식까지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 자의식이 얼마나 허약하다는 사실은 술을 많이 마시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자의식이라는 것도 결국 뉴런간의 정보 전달에 의한 결과이며, 영혼처럼 실체하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똑같이 뇌를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을 하며, 어떤 사람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조하는 자아가 실체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 또한 앞서 말한 상전이 현상과 같이 뉴런간의 상호작용이 정량적이든 정성적이든,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 질적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주에 ‘나’라는 존재는 실체하지 않으며, 내가 죽으면 태풍이 소멸하듯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그럼 나는 왜 태어났는가. 일부 종교에서는 축복이라 하겠지만, 내게 있어서 생명으로 태어난 것은 우주 진화의 희생물이다. 고통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쾌락도, 이성도 마찬가지다. 생명은 우주 진화의 피해자이다.
생명이란 자기조직화라는 현상에 불구하므로 존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약이다. 생명이란 우주 진화의 희생물이므로, 나는 고통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정의한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생명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바꿔 말해,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생명은 나의 관점에선 죽어도 상관없다. 신경이 마비된 사람은 죽어도 되는가? 그 말이 아니다. 죽는 과정에서의 정신적인 고통 또한 없어야 하며, 고통을 느끼는 다른 생명이 그 죽음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미생물은 생명의 존엄함을 지니지 못했다. 바꿔 말해 죽어도 상관이 없다.
그럼 이제 딴 소리 그만하고, 내게 사명으로 다가온 명제가 뭔지 말하겠다.
‘나’의 실체는 없으며, 생명체는 우주 진화의 희생자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고통을 지고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자세로, 어떤 방향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가. 위 고민의 결론은 고통의 최소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고통을 최소화 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왜 하필 고통만 따지는가. 쾌락도 있고 행복도 있는데 라고 물을 수 있다. 비관적인 시각 탓도 있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존재한다는 ‘자의식’의 허구와 그에 대한 집착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한 개체의 고통이 결과적으로 다른 개체의 행복을 가져오더라도, ‘고통’의 최소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고통을 최소화 하는 길에선 여러 가지 난점들이 많다. 고통을 정량화 할 수 없으며,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 이 관점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