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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ANIC

고등학교 때 시사(독서)토론부라는 동아리를 했었다. 시사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토론하는게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래 동아리 이름은 독서토론부(간디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모임)이었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포스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입생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그 다음해에 시사토론부로 바꿨다. 그리고 나는 시사토론부일 때 들어갔다.

그 동아리에서는 다음 카페를 하나 운영했다. 몇몇 동아리가 그렇듯이 오프라인에서는 서먹하고 온라인에서는 활발한 그런 동아리였다. 나도 실제 토론을 할 때는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온라인에서만 설레발을 쳤다.

이런 글, 저런 글 정말 다양한 글들을 많이 썼다. 처음으로 내 생각을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쓴 글 중 시사적인 내용은 거의 없었고, 푸념섞인 얘기나, 냉소적인 내용, 주제를 알 수 없는 글이 대다수였다.
지금 보면 피식하고 웃을 수 있는 너무나 유치한 글들이다. 논리의 헛점 투성이이고, 아무 근거도 없는 글들도 있고, 알지도 못하면서 그럴싸한 낭만주의 과학에 빠져있기도 하다. 간혹가다 한 두개 내가 이런 생각을 다 했었나 하고 놀라는 글들도 있다. 망각의 속도는 지식 습득의 속도보다 빠를 뿐 아니라, 창작의 속도보다 빠른 것 같다.

유치한 글이 대부분이라 할지라도 그때만큼 생각이 폭발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아무 글이나 자유롭게 쓸 수 있었기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기에, 내겐 어디보다 편안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보다 많은 것을 배웠던 곳이다. 중독성이 강한 선배들의 글, 그 깊은 생각, 그리고 유쾌한 글 솜씨. 그 선배들은 모두 서로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는지 모두들 (내가 쓰는 표현으로) 영혼이 깊은 것 같았다.

그 카페는 이제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다. 초라한 간판과 먼지 쌓인 낡은 소파만 있는 텅 빈 카페다. 파리마저도 날리지 않는다. 가끔 옛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한번씩 나처럼 안을 둘러보고 가기는 하는 것 같다.

그 카페의 이름은 'pPANIC'이다. 뜻은 psychological panic, '정신적 공황'이다. 왜 그렇게 지었는지 선배들에게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 그 카페를 들어갈 때마다, 카페가 살아있는 것에 안도한다. 거기 있는 글들이 다 날아가 버린다면, 고등학교 시절의 절반이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카페에 있는 글들을 하나씩 따로 옮기고 있다. 할 줄 아는 방법이 없어서, 그냥 통째로 긁어서 한글 파일에 붙이고 있다. 내 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 중 일부도 포함해서 옮기고 있지만, 카페에 썼던 글은 역시 카페에 걸려 있어야 한다. 카페에서 먹던 커피를 집으로 가져온다고 그 맛이 나지 않듯이.

카페에 썼던 글들을 블로그에도 가끔 올릴 것이다. 엉성하고, 유치한 글도 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_-;



결국 이 글의 목적은 'pPANIC'이란 태그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앞으로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게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인터넷 속 어딘가를 떠도는 내 기억분자들을 이 곳에 모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