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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ckel의 반복원칙'의 심리학적 변용

개인에게 적용되는 지표들을 집단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개인과 집단이 비슷한 행태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는 직관이다. 다만 집단과 개인의 자기유사성을 가정하면 문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한 비유를 통해 집단을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집단과 개인을 동치 시키면, 파시즘과 유사하게 흘러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있어서의 세포와 국가 집단에 있어서의 개인은 유사하지만, 동치 시킬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세포들은 갈등을 통해서 동역학적 안정성을 획득하지 않는다. 집단 분석에서의 ‘자기 유사성’은 힌트나 비유는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을 넘어서면 안 된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라는 가설이 있다. 독일의 생물학자 Haeckel이 주장한 것인데, 태내 발달은 인간이 걸어온 진화의 길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당대에 진화론의 강력한 증거로 부각되었지만,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생물학적 ‘지식’이 되지는 못했지만, 여러 분야에 강력한 영감은 줄 수 있었다.

청년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G. Stanley Hall 은 Haeckel의 가설을 발달심리학에 적용하였다.[각주:1] 즉, 반복원칙은 출생 후에도 계속 되어, 인류의 발달과정이 개인의 발달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유명한 ‘질풍노도의 시기(A period of storm and stress)’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인데[각주:2], 청년기는 야만시대에서 문명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설명하였다. 일견 재미있는 생각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얼그레이’라는 비공개 게시판에 그것에 관한 글을 쓴 적도 있다. 한 개인의 사고와 예술의 발전은 인류가 만들어 낸 유산의 과정을 밟아간다는 것이 요지였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연기는 가볍기 때문에 위로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모든 물체는 정지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갈릴레오의 사고실험을 배우고, 뉴턴의 역학대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며, 이 후 대학에 와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배운다. 왜 우리는 더 정확하게 세계를 표현하는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나중에 배우는 것일까. 우리의 경험적 직관에 가장 들어맞는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다. 갈릴레오는 그 경험적 직관에 머물지 않고 사고 실험을 했다. 뉴턴은 갈릴레오의 시대에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업적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아인슈타인은 뉴턴과 맥스웰 등 이전에 밝혀진 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상대성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양자역학 또한 그 이전의 물리 법칙들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우리가 뉴턴을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보다 먼저 배우는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서 생긴 직관은 뉴턴을 더 이해하기 쉽도록 짜여져 있으며, 그것이 머리 속에 체계로 잡혀 있다면 그 때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늦게 나온 이유는 측정범위의 한계의 영향이 크다. 일상에서는 겪을 수 없는 물리적 조건을 다루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일상에서 겪을 수 있고, 쉽게 사고를 통해 조작실험을 해볼 수 있는 뉴턴역학이 더 이해가 쉬운 것은 당연하다. 개인의 물리적 사고 발달은 인류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가설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과학교육학 분야에서 체계잡힌 설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시 Hall의 가설로 돌아가자.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해보면, 성인이 되었을 때보다 육체적인 힘, 전투 능력, 키 등이 개인 간의 미시적 정치 지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흔히 짱, 통(부산에서는 짱을 ‘통’이라 부른다)이라고 불리는 싸움 잘하는 놈 근처로 졸개들이 따르며, 그들은 한 반은 물론이고 자기들이 마치 학교의 대표가 되는 양 다른 친구들 위에 군림한다. 얌전한 무리의 친구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얌전한 무리는 싸움 잘하는 친구들과 시비가 생길 일은 피한다. 지하경제가 비정상적으로 커지지 않는다면, 성인들의 세계에서는 조폭과 조폭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권이 분리되어 있어 직접 부딪칠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중 고등학교 때는 좁은 장소에 같이 생활해야 되기 때문에, 개인 간의 서열도 필요하고, 집단 간의 서열도 필요하게 된다. 그 누구도 서열을 매긴 적은 없지만, 각자가 알아서 조심하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싸움패 무리는 생기지 않다가, 중 2 때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학교와의 집단 패싸움도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싸움을 한 이유는 듣고 보면 정말 사소한 것이다. 학교들 간의 전투적 기싸움. 그 때는 전투력이 왜 그렇게도 중요했을까. 고등학생이 되면 집단 패싸움은 덜하지만 학교간의 전투적 기싸움은 여전했다. 누가 동네 짱일까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합법적인 폭력(경찰)이 생기기 전의 사회, 즉,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자연 상태에서 지배하는 가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은 사회적 서열이 주로 자산에 의해 구분되지만 그 때의 미시적 서열은 어떻게 정해졌을까. 아마 중고등학교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힘이 센 무리가 모든 것을 차지하지는 않았겠지만, 힘이 약한 무리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힘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던 시기를 지나 정신적인 능력(지적 능력, 대인 능력)이 더 미시적 서열에서 중요해 지는 과정은 인류가 겪었던 과정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물론 증명할 성질의 것은 아닌 흥미를 위한 가설이다)

또 한 가지, 어렸을 때는 보통 순수하다고 한다. 선(善)도 순수하고 악(惡)도 순수하다. 자기 마음을 숨길 줄 모르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부족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정적 정서표현을 자제하는 능력은 3세경에 나타난다고 한다(Cole, 1986)(주석: 297p) 나이가 찰수록 정서를 규제하고, 충동적 욕구를 절제하는 능력은 향상된다. 중 고등학교가 되면, 충동을 자제하는 능력은 여전히 미숙하지만, 기본적인 대인관계 능력은 거의 습득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지 않게 배려(혹은 이용)하는 능력은 나 자신의 경험 상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해당 사회에 맞는 대인관계 규칙들(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나이 등의 서열을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을 모두 습득하게 되는 때는 직장 등의 돈벌이를 잡게 된 이후 몇 년일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완성이 되는 시기도 다르고, 완성이 되었을 때 개인별 대인능력의 차이는 클 것이다. 속마음을 표정으로 숨기는 법, 속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법, 외교적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돌려 말하는 법, 예의상 해주는 말들을 적절히 고르는 법, 겸손 떠는 법 등을 시행착오와 역지사지, 혹은 경험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설명을 들으며 습득하게 된다.

겸손을 예로 들어보자. 최소한 겸손한 척이라도 하는 것이 대인 관계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들을 관찰하면, 자기 자랑을 거침없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시점부터 무조건 자기자랑 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더라도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는 과도기적인 단계를 겪게 되는데, 그 이후에 겸손을 떨어야 될 자리와 겸손을 떨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구분하여 욕구를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처음부터 겸손함을 타고 나는 것이 훨씬 유리 할 텐데, 왜 우리는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하는 걸까. 어릴 적을 생각하면, 겸손한 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자랑 하는 친구들 주위로 친구들은 몰려들고 그 친구를 부러워하며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주변으로 밀리게 된다. 집에 돈이 많아 장난감이 많든, 능력이 좋든 자랑하는 것이 숨기는 것보다 유리한 시기가 있다. 또한 겸손이라는 것이 대인관계에서는 유리하지만, 개인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정말 속마음까지 겸손해질 수 있을까. 겸손이라는 것은 속마음과 반대되는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며, 정말 마음속까지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이상자아가 매우 높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아야 한다. 자존감이 낮아서 겸손한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부정적 자아 형성이다. 자기비하를 즐겨하는 사람을 겸손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겸손한 사람들은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인데, 자존감이 높은 사람 일수록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덜할 것이기 때문에, 겸손함을 표현함에 있어 유리하다. 자기 자랑하는 것이 유리한 시기에서 욕구를 억누르고 겸손한 것이 유리한 시기로 전환되는 때에 우리는 겸손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고, 겸손해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할 것이다.

Hall의 원리를 단순 적용한다면, 초창기 인류는 겸손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잘난체를 하기에 바빴으며, 자랑을 하는 개체는 대인관계에서 유리했다. 왜냐면 아무도 겸손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랑하는 개체가 부럽고 재수 없었지만 그들과 친해지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리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이용해 마치 능력있는 척 거짓 정보를 보내는 개체도 있었다. 그것을 가려내는 것이 중대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한 개체가 겸손이라는 기술을 처음 사용했다. 자기 속마음을 숨기면서 겸손함을 발휘했던 그 개체는 다른 개체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대신 자기의 능력을 표현하지는 못했기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능력을 계속해서 보여줄 수 있는 조건에 있었다.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포장하는 판에 아무도 말만으로 능력을 믿을 수 없으니, 결국 사람들은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훗날 반복 시연을 통해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을 따르게 되었다. 능력이 있든 없든 겸손한 게 유리한 형국이 되었고, 겸손이라는 밈(meme)은 퍼지게 되었다...는 시나리오다.

겸손을 포함한 개인의 대인 관계 능력의 발전은 인류의 대인 관계 패턴 변화를 압축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 요지다. 정말 그럴까?

재미있긴 하지만 너무 단순화시켰기 때문에, 함정이 많다. 근대에 압축적으로 일어난 일을 전 인류사에 걸쳐서 일어났다고 오해했을 여지도 있으며(계급사회에서는 소통할 수 있는 대인의 범위와 행동 패턴에 제약이 많았을 것이다), 어른이 지금 어린이나 청소년 같은 적이 있었다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라도 했을지 하는 의문으로부터, 발전 과정이 아주 옛날에 단시간 내에 완성되어서 계속 유지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인류학을 공부하지 않고서 지금 한 얘기가 다 무슨 소용일까 싶다. Hall은 자신의 저서[각주:3]에서 어떤 근거를 제시했을까.

  1. 1. 정옥분, 발달심리학, 학지사, 474쪽 [본문으로]
  2. 2. "질풍노도"라는 말은 독일의 작가 괴테와 실러에게서 빌려온 표현이다. [본문으로]
  3. 3. Hall, G. S. (1904). Adolescence: Its psychology and its relations to physiology, anthropology, sociology, sex, crime, religion, and education. Englewood Cliffs, New Jersey: Prentice-Hal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