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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279년 (2002년 11월 23일 작성)

발전이란 무엇일까.
인류가 발전한다는게 무엇일까. 요즘 나는 이런 고민에 휩싸여 있다.
한때는 나도 인류는 당연히 좋은 쪽으로 좀더, 진실되고 현실적인 쪽으로 발전할줄 알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보수적인것 같다.
기술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농경생활에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우리가 잡아먹기 위해 동물을 키우는 그 행위도 너무 야만적으로 느껴진다.
아무리 생각할줄 모르는 식물이라지만, 어떻게 우리가 먹기위해 기를수 있는가. 나는 식물이 생각은 할수 없어도, 느낌은 있다고 생각해왔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은 우리가 먹기위해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기른다는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인생이 비참하게 느껴질까.
기술자들은, 농경을 하게 되면 좀더 풍족해질수 있으며, 생명은 끝없이 생산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농경에 반대하는 사람중에 한명은,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가 먹을 것을 일정하게 생산해주는데, 농경을 하게 되면, 우리가 그걸 한꺼번에 써버려, 금방 식량이 달아날꺼라고 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것 뿐이다. 자연은 인간이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자연이 주는 것을 받아먹으며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께서 말하셨다.(아버지께서도 나와 같이 농경생활에 반대하신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신 앞에 있다. 우리는 그 자연이라는 신 아래에, 다른 모든 종들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하나 나은 종은 없다고 했다. 그건 식물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며, 심지어 흙속에 사는 미생물들도, 그리고 그 미생물로 생명의 힘을 얻는 흙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스스로의 욕심으로 그런 자연의 이치를, 생명의 신비를 조작하려 한다면, 신에 대한 도전이요, 모독이요, 오만이라고 했다.

산에 나있는 풀들은, 산에 뛰어다니는 동물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며,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를 깨뜨리고, 식물을 일정한 땅에 모아 기르고, (이럴때는 잡초는 뽑아버린다고 한다.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동물을 가두어 놓고 먹이를 주며 기른다면 우리는 좀더 풍족해질지 모르나, 분명 신의 벌을 받게 될것이다.

기술자들은 말한다. 어떻게 그게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냐고.
농사를 짓다 땅의 기운이 떨어지면, 기르던 동물의 똥을 모아 거름을 만들어 뿌리면 된다고, 이것만 봐도 분명 이건 합리적인 방법이며, 오히려 신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라고.

그들의 말에 우중들은 맹종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족하게 해줄 꺼라고, 그러면 더 행복해질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아.. 어떻게 먹기위해, 오로지 우리를 위해, 동물과 식물을 기르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들을 한마리씩 죽이고, 그걸 또 웃으며 먹을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우리는 예전에, 자연에서 뛰어다니는 동물을 찾아, 다른 육식동물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잡았고, 혹시라도 놓치기라도 하면 신의 섭리구나 생각하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살이라도 포동포동 찌지 않으면, 새끼를 많이 낳지 않으면, 재수가 없다며 푸념을 하고 있다.
기르던 식물이 잘 자라지 않거나 썩어도 마찬가지다.

한 사회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지금과 같은 농경사회가 계속 발달한다면, 그에 따른 부의 격차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계층이 생기게 되고 우리 사이에도 서열이 매겨질꺼라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
그게 어떻게 좋은 세상인가.

그래, 부유해지기만하면 다 좋은가.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발버둥 치더라도, 세상은 그쪽으로 계속 발달할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우려한 방향으로 가게 되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농사가 잘되면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겠다고?
너희들이나 잘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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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등학교 2학년 때 pPANIC 카페에 썼던 글이다. 이 글은 신석기 혁명이 서서히 일어나려 할 때, 농경생활을 반대하는 한 소년의 생각이라고 가정하였다. 과학 기술에 의한 자연 파괴는 마치 죄악처럼 말하고, 농경생활로의 복귀를 당연히 인간이 행해야 할 이치라는 듯이 말하는 주장에 대해, 그 주장이 상대적인 것일 수 있다는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수렵 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의 변화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변화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농경생활은 기존에 존재하는 환경을 조작하는 것이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화합물들과 가공물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산업 사회는 기존의 환경 네트워크를 통째로 변화시킨다. 그렇지만 그 변화의 본질은 같다. 농경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또한 환경과의 '조화'에 관해서 고려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농경사회로의 변화든 산업사회로의 변화든 포스트 모더니즘으로의 변화든 그 변화에 있어 절대적 가치란 없다.

자연 과학자가 보는 '환경'과, 공학자들이 보는 '환경'이 다르고, 경제학자들이 보는 '환경'과 미학자들이 보는 '환경'이 다르다. 그리고 아무런 대안도 없이 막무가내로 환경의 보호를 주장하는 일부 환경 운동가들의 '환경'도 다르다.
어느 입장에서 환경을 바라보든, 조금 더 생산적이고 타협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해 질 필요가 있다.

1. 우선 우리가 말하는 환경 보호란 철저하게 (생존적, 경제적, 심미적 차원에서) 인간을 위한 환경 보호라는 점.

2. 그리고, 일부 환경 서적에서 주장하는 농경생활로의 복귀나,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는 것.



여하튼 나에게 묻는다면, 고통 최소화의 관점에서 환경 문제를 바라 볼 것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