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미군 휴일이라 오늘 저녁 집으로 나섰다. 동대구역에서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시사 in' 주간지를 사들었다. 앞으로 외박 나갈 때마다 '시사 in' 주간지를 사주기로 마음 먹었다. 우석훈씨 블로그에서 '시사 in', '시사 in' 하길래 지난 주에 한 부를 샀는데 그게 대박이었다. 다른 메이저 언론들이 한통속으로 놀아나고 있을 때 '시사 in'은 용기있게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을 그대로 커버스토리로 실었다. 처음 사자마자 독립언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시사 in'과 '한겨례'가 없었다면, 나야 그냥 모르고 살았겠지만, 김용철씨는 기분이 어땠을지 절망적이다. 군인의 하루 일당을 다 내는 것이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고 외박 나갈 때만이라도 팔아주기로 했다. 내가 진실을 들을 수 있는 자유를 구입하는 것과 동시에 미래에 진실을 말 할 수 있는 자유에 투자하는 비용으로 1~2 주에 삼천원은 아주 저렴한 편이다.
잡지를 사고도 기차가 출발하기 전까진 30분 정도 남아 빈의자를 찾아 앉았다. 앉아서 '시사 in'을 읽고 있었는데 한 할아버지가 내 앞을 비집고 옆에 앉았다. 앉자마자 늙어서 움직이기도 힘들다는 불평을 나를 쳐다보며 하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막 말을 거는 나이 드신 분들을 가끔가다 만나봤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도 그런 분이셨다. 내게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를 물어보았다. 군인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27년간 군인이었단다. 대령까지 하다가 전두환 한테 밑보여서 별을 달지 못하고, 제대 했다고 하셨다. 육사 17기라고 하셨다. 일어나서 경례를 해야 하나 주춤하였다. 이제 퇴역했고, 사복을 입고 있으니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정말 할 필요도 없다. 전 국방장관들의 성함을 대면서 자기보다 기수가 낮은 누구누구라고 말을 해주었다. 대령이셨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옛날 군대 얘기를 하면서 엉덩이에 상처가 터져 진물이 나오고 거기에 팬티가 들러붙고, 그걸 떼어내는 고통까지 설명하시며 선임이 욕 좀 했다고 자살하고, 선임에게 대드는 요즘 군인 병사들을 꾸짖으셨다. 내 얼굴을 보며 호통을 치시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네.. 맞아요." 하면서 맞장구는 쳐주었다. 그런 고생을 하시며 군에 다니셨던 분들이 그런 마음 느끼실 것 당연할 것 같았다.
어디로 가시는지 어떤 기차를 타시는지 물어봤다. 지리산에 등산했다가 호주머니를 열어놨던지 지갑이랑 핸드폰을 다 잃어버렸고, 원래는 버스 타려고 했는데 주머니에 있던 돈이 부족해 일단 대구까지 왔다고. 여기서 무궁화를 타고 가려 하는데, 그 역시도 집인 원주까지 돈이 모자라서 일단 상주에 내려서 걸어가야 할지 어떨지 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기차는 10시 넘어서나 있다고 하셨다. 그때가 7시가 좀 안 되었을테니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순간 혹시 또 내 호주머니를 열려는 연기였나 생각이 들었다. 하도 많이 당해서다. 그리고 당하는 걸 알면서도 항상 돈을 주었다. 이번에도 치밀한 연기였나 생각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우선 대령이셨다는 그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고, 내가 먼저 물어봐서 대답하신 것이니. 그리고 돈을 주길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갑에 딱 육천원이 있었는데, 군인이라서 돈이 많이 없다고 운을 띄우며 가는 길에 보태시라고 오천원을 드렸다. 처음엔 살짝 거절하시더니, 고맙다고 받으셨다. 이름을 남겨달라고 하셨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주워 들었던 연쇄작용이 생각이 났다. 돈 보태어 줌 ㅡ> 팅 ㅡ> 탱 ㅡ> 통 ㅡ> 포상휴가. 아이구 됐다. 지금은 완전히 퇴역하시고 그럴 힘도 없어 보이셨다. 그냥 됐다고 괜찮다고 하였다.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시사 in'을 조금 읽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최근 잠을 많이 못 잤다. 집에가서 시간도 잊고 '나'도 잊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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