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은 반이다.
그런데 매 순간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은 일의 새로운 반만을 할 수 있으며, 완성된 일의 양은 (1/2)의 무한 등비 급수의 합이다.
결국 우리는 무한대의 시간이 지나야 일을 끝낼 수 있다.
(단, 매 순간은 특정한 길이의 시간으로 양자화 시켜야 의미가 있다.)
2.
쥐뿔도 모르지만 한의학과 양의학의 차이점은, 네트워크 중심과 분석주의(?) 중심의 차이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적이 있다. 다소의 경험으로 한의학은 신체기관의 다른 신체기관과의 연결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양의학은 신체기관을 쪼개고, 분석적으로 접근한다.(여기서 '분석적'이라는 의미는 쪼개서 각각의 매커니즘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양의학은 직접적인 치료를, 그리고 한의학은 간접적인 치료를 주로 하는 이유도 이런 시각차이에서 오는 것인 듯하다. 신체야 각 기관이 제 기능을 함과 동시에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그 어느 의학이 우월하다고는 말은 못하겠다. 다만 한의학의 강력한 장점이라고 하는 네트워크적인 관점은 양의학과 과학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중이라, 한의학적인 치료 방법들이 양의학의 관점에 의해서도 하나씩 설명이 되어, 결국 학문의 구분이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3.
요즘에 개콘에서는 "키컸으면"이라는 코너를 한다. 키 작은 개그맨 둘이가 나와, 예전 "시커먼스"와 비슷한 리듬에 맞춰 키가 작은 것을 서로 놀리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멜로디에 맞춰 "머리, 어깨 무릎 발... 까지 160"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자학개그다. 그렇게 기다려지는 코너는 아니지만, 곧잘 웃는 코너다. 그 개그맨 둘과 나는 키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사실 따지고 보면 나를 놀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 스스로도 키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테지만, 서로를 놀리는 그 프로그램에서는 오히려 그 컴플렉스에 해탈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키작은 컴플렉스가 개그의 소재가 되어 오히려 인기를 가져다줘서 그런 것일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자학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웃음이 담겨 있는 자학은 어떨까. 숨기고 싶은 점을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 자신의 컴플렉스에 대고 스스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거기에서 초연해졌음을 뜻한다. 물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심각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키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민했던가. 여자애들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던 걸 나는 모두 키 책임으로 돌려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나 또한 희화화라는 방법을 (꼭 키뿐만이 아니라) 컴플렉스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쓰고 있다.스스로의 희화화는 여유가 생긴 증거임에 동시에 그 여유를 가져다 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런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긴 것도 나를 좀 더 여유있게 바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말이다.
4.
착각은 자유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착각이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5.
카메라로 그 영상이 보내지는 화면을 비추면, 끝이 없는 화면이 이어진다.(물론 카메라가 더 이상 잡아 낼 수 없을 만큼 화면의 크기가 작아지면 끝이 나겠지만.)
초고속 카메라로 화면을 비추고 싶다. 그 긴 화면의 행렬은 결코 동시적인 순간이 아이다. 처음 화면의 모습이 카메라로 들어오고, 카메라에서 다시 영상장치로 전송 되어, 그 화면을 비추고, 그럼 다시 그 화면이 카메라로 전해지고 이 과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초고속 카메라로 그 모습을 찍으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멀어지는 속도로 신호가 전송되는 속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쓸모도 없지만 말이다.
그럼 마주보고 있는 거울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불을 탁 켜는 순간 점점 거울들이 멀어지겠지. 그리고 계속 불을 켜 놓으면, 광자들이 왔다갔다 하는 steady state에 머무르겠지. 저 깊은 거울 속 심연까지.
시작은 반이다.
그런데 매 순간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은 일의 새로운 반만을 할 수 있으며, 완성된 일의 양은 (1/2)의 무한 등비 급수의 합이다.
결국 우리는 무한대의 시간이 지나야 일을 끝낼 수 있다.
(단, 매 순간은 특정한 길이의 시간으로 양자화 시켜야 의미가 있다.)
2.
쥐뿔도 모르지만 한의학과 양의학의 차이점은, 네트워크 중심과 분석주의(?) 중심의 차이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적이 있다. 다소의 경험으로 한의학은 신체기관의 다른 신체기관과의 연결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양의학은 신체기관을 쪼개고, 분석적으로 접근한다.(여기서 '분석적'이라는 의미는 쪼개서 각각의 매커니즘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양의학은 직접적인 치료를, 그리고 한의학은 간접적인 치료를 주로 하는 이유도 이런 시각차이에서 오는 것인 듯하다. 신체야 각 기관이 제 기능을 함과 동시에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그 어느 의학이 우월하다고는 말은 못하겠다. 다만 한의학의 강력한 장점이라고 하는 네트워크적인 관점은 양의학과 과학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중이라, 한의학적인 치료 방법들이 양의학의 관점에 의해서도 하나씩 설명이 되어, 결국 학문의 구분이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3.
요즘에 개콘에서는 "키컸으면"이라는 코너를 한다. 키 작은 개그맨 둘이가 나와, 예전 "시커먼스"와 비슷한 리듬에 맞춰 키가 작은 것을 서로 놀리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멜로디에 맞춰 "머리, 어깨 무릎 발... 까지 160"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자학개그다. 그렇게 기다려지는 코너는 아니지만, 곧잘 웃는 코너다. 그 개그맨 둘과 나는 키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사실 따지고 보면 나를 놀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 스스로도 키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테지만, 서로를 놀리는 그 프로그램에서는 오히려 그 컴플렉스에 해탈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키작은 컴플렉스가 개그의 소재가 되어 오히려 인기를 가져다줘서 그런 것일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자학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웃음이 담겨 있는 자학은 어떨까. 숨기고 싶은 점을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 자신의 컴플렉스에 대고 스스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거기에서 초연해졌음을 뜻한다. 물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심각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키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민했던가. 여자애들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던 걸 나는 모두 키 책임으로 돌려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나 또한 희화화라는 방법을 (꼭 키뿐만이 아니라) 컴플렉스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쓰고 있다.스스로의 희화화는 여유가 생긴 증거임에 동시에 그 여유를 가져다 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런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긴 것도 나를 좀 더 여유있게 바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말이다.
4.
착각은 자유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착각이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5.
카메라로 그 영상이 보내지는 화면을 비추면, 끝이 없는 화면이 이어진다.(물론 카메라가 더 이상 잡아 낼 수 없을 만큼 화면의 크기가 작아지면 끝이 나겠지만.)
초고속 카메라로 화면을 비추고 싶다. 그 긴 화면의 행렬은 결코 동시적인 순간이 아이다. 처음 화면의 모습이 카메라로 들어오고, 카메라에서 다시 영상장치로 전송 되어, 그 화면을 비추고, 그럼 다시 그 화면이 카메라로 전해지고 이 과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초고속 카메라로 그 모습을 찍으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멀어지는 속도로 신호가 전송되는 속도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쓸모도 없지만 말이다.
그럼 마주보고 있는 거울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불을 탁 켜는 순간 점점 거울들이 멀어지겠지. 그리고 계속 불을 켜 놓으면, 광자들이 왔다갔다 하는 steady state에 머무르겠지. 저 깊은 거울 속 심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