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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가의 역설


은행가의 역설

돈을 빌려주는 은행가에게는 딜레마가 있다. 보통 돈을 빌려주는 은행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리려고 한다. 은행가는 누구에게 돈을 빌려줄지 힘든 결정을 해야 한다. 이 때 어떤 사람은 신용이 좋고 따라서 돈을 제 때 갚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신용이 나쁘고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할 수도 있다. '은행가의 역설(Tooby & Cosmides)'은 이런 경우에 생긴다. 절박하게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신용이 형편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돈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용이 훨씬 나은 사람들이며, 따라서 은행의 입장에서는 절박하게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를 거절하고 정작 돈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마음의 기원> 2판, 데이비드 버스, 나노미디어, 393페이지 


이건 우리 삶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천원만 줘도 그 사람에겐 크지만 그것은 절대 나에게 돌아올 수 없는 돈이다. 반대로 큰 돈을 빌려줘도 믿을만한 친구나 금융 기관에서는 이자까지 얹어서 준다.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이기적으로 사는 것보다 더 잘 잘 살 수 있는 것은 호혜적 관계, 즉 주고 받는 것이 있음으로서 가능하다. 그런데 돌려받을 확률이 매우 작다면? 

살다보면 이런 상황에 한두 번 처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가 없는 아이에게 친구가 되주는 것은 얼마나 그 친구 입장에서 고맙겠는가. 그런데 그 친구의 사회적 자본의 결여는 관계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이득의 기대치가 적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친구가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 친구에게 사용한 시간적 자원의 기회비용은 다른 (많은 친구들을 거느린) 친구와의 관계에 써야 했을 비용이다. 그래도 그 친구는 친구가 되면 나에게 잘해주긴 할 것이니 선택해야 한다.  

한 명의 자식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부모의 많은 보살핌이 필요하고 다른 한 명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아 보살핌이 덜 필요하다. (부모로서의 마음은 생각지 않고) 순수하게 유전자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부모의 자원을 장애를 갖지 않은 아이에게 투자하는 것이 낫다. 장애를 가지면 비장애인과 결혼을 하기가 쉽지 않고 사회 적응이 아무래도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은 장애를 가진 아이다. 은행가의 역설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외롭다.", "오랫동안 애인이 없어 연애세포가 말라간다." 등등 연애가 고프다고 징징대면 징징댈수록 매력은 떨어진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보고 구제해달라고? 니가 연애를 못한 건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은행가의 역설 그대로 절박한 사람은 그만큼 연애 상대로의 신용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외롭워 미치겠고 어떻게 해야되는지도 모르겠고 환장하겠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중간은 간다. 여유있는 척, 안정적인 척 해야 한다. 정작 필요한 건 외로운 사람들인데! 


정말로 내가 도와줄 사람의 신용이 낮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 '정'으로 도와줄 순 있겠지만 돌려 받을 수 없는 도움을 지속적으로 준다면 그 사람 또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친구의 경우는 오래 함께한 시간만큼 기꺼이 도와주겠지만 가족관계가 아니라면 한계가 있다. 평생을 먹여살릴 순 없으니까. 

그러면 어려운 사람은 영원히 도움을 받는데 불리할 수밖에 없는가. 어려운 사람이 은행가의 역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일시적인' 어려움에 처했음을 보여야 한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황이나 여건이 좋지 않아 일시적임을 보인다면 절박한 상황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도움이라도 어려운 사람이 느끼는 고마움이 다소 여유있는 사람이 느끼는 고마움보다 크다. 그러므로 원래는 신용이 있으나 우연적인 사건이나 상황적 어려움에 의해 일시적으로 어려울 뿐이라면 그런 사람을 도우는 것이 도우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일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누가 도와준다면 금방 벗어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도와준다면 나는 진심으로 고마워 할 것이며 금방 갚겠다. 그리고 갚을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요즘 여러모로 어려운데 이것이 일시적인 상황인지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이렇게 모를 때도 이것은 '나' 때문이 아니며 상황 때문인 '척'을 해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