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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답노트 1페이지: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파악하기




넓은 세계를 볼 능력이 인간에겐 없다
 

사람은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주변인물들을 준거기준으로 삼는다. 여기서 준거기준은 비교대상이고, 자신이 사회에서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비교대상이다. 자존감, 행복도 등은 준거기준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라는 말을 무수히 듣지만, 그런 말을 자주 듣는다는 것이 남과 비교하지 않고는 못견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요즘에는 미디어를 통해서도 타인을 많이 접하므로 직접 만나는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준거기준이 될 수 있다. 

만약 전세계의 모든 사람을 준거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좀 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60억 인구를 모두 머리 속에 담고 비교할 수 있도록 진화되지 않았고 고작해야 100명에서 150명 (던바 넘버), 많아야 200명 정도의 사람들만 인지할 수 있다. 설사 직접 대면을 했더라도 오랫동안 만나지 않는다면 굳이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현 시점에서 대면하고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현대사회에서는 보조기억장치의 도움으로 늘어났다 하더라도) 1000명 10000명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부족들과 반복적인 교류만 해오던 인간은 그 때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인지능력의 한계로 우리는 정반대의 오류 두 가지를 범한다. 

첫째는 미디어의 발달로 세계의 아웃라이어(통계적 특이값)들을 미디어로 접하는 우리들은 잘못된 표본을 잡는다. 비율을 따지지 않고 절대적인 숫자를 따지면서 생기는 오류다. 
예전에도 엄친아 효과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엄친아들로 인해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미디어는 언제나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쪼인다. 더군다나 한 개인이 영향을 받고 미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자원의 쏠림이 극심해지면서 아웃라이어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구석기 시대의 100명~150명 집단에서 나올 확률은 지극히 낮다. 우리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 그것이 60억 인구에서 매우 낮은 확률로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화심리학의 가정을 나이브하게 적용한다면 그런 아웃라이어들조차 100명에서 150명인 무리 집단 내의 일원으로 생각할 것이다. 거기다 사람들이 낮은 확률은 과대 추정하고 높은 확률은 과소 추정하는 편향을(프로스펙트 이론) 고려한다면 극소수의 사람들이 실제로 더 많은 비율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극소수란 60억 인구에 비해서 극소수란 말이다. 가령 전 세계에 6만명이나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비율은 고작 0.0001밖에 되지 않는다. 퍼센트로 따지면0.01%이다. 그러나 우리는 0.01%와 0.1%가 10배 차이 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들은 그저 우리에게 낮은 확률일 뿐이며 아마 둘 다 1%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반드시 전 세계 인구 대 비율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가령 꽤 오래되어 지금은 많이 다르겠지만 한국에서 1억 연봉을 받는 사람의 숫자가 2만명이라는 기사가 뜬 적이 있다. 우리는 2만명의 비율이 0.0005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절대적인 숫자를 먼저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과 비교한다. 아니 1억을 넘는 받는 사람들이 2만명이나 되는데! 
골고루 비춰주지 않는 미디어는 우리의 준거집단을 왜곡시키고 종국에는 불행하게 만든다. 

또다른 오류는 정반대의 경우다. 앞서의 오류가 아웃라이어들을 자신의 이웃처럼 생각해서 발생한다면 이번에는 가까운 주변과만 비교하여 자신을 아웃라이어로 착각하는 오류다. 가령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대학가서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다. 물론 고등학교의 학생수는 던바 넘버와 비슷하고 구석기시대였다면 그는 부족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맞다. 그런데 지금은 60억명이 살고 있다. 한국만 들여다봐도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춘 사람은 끝도 없이 찾을 수 있다. 기는 놈 위에 걷는 놈 있고 걷는 놈 위에 뛰는 놈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재능 뿐인가. 자신은 노력을 정말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훨씬 노력을 많이 한 사람도 반드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어린이들에게 꿈을 물었을 때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대표적인 오류의 예다. 가수라는 대답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노래 좀 한다고 가수가 될 꿈을 꾼다면 나라도 말릴 것이다. 노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비율은 던바넘버 분의 1명의 비율보다 훨씬 작다. 즉, 던바 넘버 정도의 집단에서 노래를 제일 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과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떤가. 누구나 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자기가 아인슈타인이나 뉴튼이 될 줄 안다. 못돼도 노벨상은 탈 줄 안다.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누구나 다 자기가 빌게이츠나 스티브잡스가 될 줄 안다. 왜? 구석기 시대에서는 그 정도만 잘해도 집단에서 최고였으니까. 우리는 아주 낮은 확률을 인지할 능력이 없다. 

왜 이런 지루한 얘기를 늘어놓았을까. 내가 저지른 오류는 두번째 오류다. 던바 넘버 집단에서 잘한 것으로 아웃라이어가 될 것이라 착각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내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그 오류에 따른 실수를 말하려다 설명이 길어졌다.



우물에서 바깥 세상을 가늠하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했다. 지금도 석사과정에 있다. 그런데 물리학을 전공한 이후로 한번도 물리학에 자신감을 가졌던 적은 없다. 대학 생활 내내 숙제와 과제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래서 이렇다 할 대학생활을 즐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물리 베이스를 탄탄히 다진 것도 아니다. 물리학과를 온 이유는 처음부터 사회를 연구하고 싶어서였다. 사회를 연구하고 싶은데 왜 물리학과를 왔냐고? 그 이유에 대해선 따로 다룰 것이다. 짧게 말하자면 사회를 연구하는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그 중 물리학을 베이스로 잡고 싶었다. 물리학적 방법론으로 사회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 고등학생 때 확신했다. 그리고 물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컴퓨터로 사회를 시뮬레이션 하고 싶었다. 꾸며낸 기억은 아닌 것이 졸업할 때 학교 교지의 졸업생 인터뷰에 저렇게 적어 넣었다. "저는 신이 되고 싶습니다. 컴퓨터 속에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어쩌고 저쩌고. 고등학생의 허세 쩌는 말이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때부터 꽤나 분명한 진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또 하나 물리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물리학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교생이 얼마 없기도 했지만 당시 물리II를 선택한 학생들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물리를 제일 잘했다. 포스텍(당시엔 포항공대)으로 진학을 했는데 포스텍 학생들 중에 누구 하나 학교에서 공부 잘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나도 그랬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내가 최고라는 우월감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에서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이 또한 대부분의 포스텍 일반고 진학생들이 느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느끼는 것이니 문제가 없을까? 만약 내가 실험 물리학을 할 생각이라면 문제가 없다. 평균정도의 실력이었는데, 평균정도의 실력을 가지고도 실험 물리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교수가 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취직을 하는 등 다른 길도 괜찮다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어느정도 보상도 받는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물질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에 관심이 있고, 물리학은 그저 도구 정도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평균정도의 성적으론 이도 저도 하지 못한다. 사회현상을 다루기도 하는 통계 물리 분야는 이론 물리학이다. 이론 물리를 그저 그런 실력으로 하려면 어려움에 부딪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물리를 공부함에 있어 흥미를 느껴야 한다. 그리고 정통 물리학이 아닌 사회현상을 연구하려면 해당 분야에 관해서는 따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물리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도 필요한 부분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물리학 하나만 따라가기에도 버거워 질질 끌려다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물리학을 베이스로 잡고자 했던 선택은 실패다. 사회과학 쪽으로 처음부터 베이스로 잡고 수학, 컴퓨터 등 필요한 것들을 들었다면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당시는 그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만약 종합대학으로 진학했다면 분명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도 붙었는데 포스텍을 갔던 지라 요즘 들어 깊은 후회에 시달린다. 몸이 망가질 정도의 스트레스다. 서울대학교의 이론 물리학 교수님들에게 시달렸다면 더 빨리 물리를 접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고 조금 더 내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더 빨리 적절한 길을 찾을 기회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더 넓은 세상에 도전해보았다면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수능 공부만 하고 어려운 문제집이나 경시대회 등은 경시했다. 내 한계에 부딪치는 게 싫었고 실패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만약 경시대회 등에 나가서 내 위치를 어느 정도 알았다면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리학자가 되려면 던바넘버 수준에서 잘하는 정도로는 되지 않는다. 이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그것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경시대회 등 더 넓은 세상을 탐색하는 길이다. 



자신의 위치를 오판하지 않으려면 

앞서는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한 것이지만 자신의 위치를 잘못 판단하는 오류는 누구나 자주 겪는 일반적인 오류다. 누구나 자신은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위인이나 스타가 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물론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꿈을 크게 가지도록 부추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디어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낮은 비율로 존재하는 사람들인지 직관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조건 꿈을 크게 가져야 할 청소년기를 지나 꿈을 깍아내며 조각해야 할 때가 오면 어떻게 자신의 목표를 설정해야 할까. 물론 시간이 많을 때는 목표를 상향 조정하는 게 옳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따라 자신이 어느 정도의 비율 안에 들어야지 그것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을지를 계산해야 한다. 어떤 일은 던바 넘버 내에서 잘해도 충분히 높은 위치를 차지 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은 던바 넘버로는 택도 없고 천명 혹은 만명 아니면 그 이상의 범위에서 잘해야지 인정 받을 수 있는 일이 있다. 예술은 아마 그 극단에 있을 것이고, 이론 물리학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극단에 있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정확한 비율을 알 수도 없다. 그렇지만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이미지들에 속지 않기 위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아웃라이어들을 보고 지나치게 열등감 느낄 필요도,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좁은 우물에서 잘한다고 우쭐대지 말고 항상 더 넓은 무대로 움직여야 한다. 언제나 나보다 나은 사람은 존재하며 그들에게서 배우려 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라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일은 던바 넘버 정도에서조차 잘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많다. 이 글은 남들이 말리는 진로를 선택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말리는 이유는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