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은 사실 하루밤 사이에 외계인이 와서 주입시켜 놓은 게 아닐까라는.
설사 엄마 뱃속에서의 나이를 합해 스물 셋을 살았다는 기억이 감쪽같은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걸 알아 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가족들, 주위 친구들을 통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트루먼쇼처럼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 꾸며진 공간이고 등장하는 사람도 모두 나를 위해 연기하는 것이고, 뇌는 사실 어딘가에 둥둥 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관념론 내지, 환상론까지 가고 싶진 않다. 다만 나는 기억이 하룻밤 사이에 주입되었다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일 뿐.)
오늘은 저녁이 될 때까지 집에 혼자 있었다. 11시쯤에 일어났지만 그 땐 모두 나가고 없었다. 그렇게 깨어서 혼자만 있으면, 난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 사랑, 아픔, 추억, 기억, 언어, 책, 블로그,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주입되어진 것이라면...
매일 밤 자는 나로써는 매일 아침 그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니, 매일 밤 잤다는 기억조차 주입되었는지도 모르지..
만약 진짜로 그렇다면, 외계인이 인간의 하루 삶을 조사하기 위해 스물 세해의 기억을 주입시킨 것이라면, 그렇게 내 인생이 사실은 하루라면, 그걸 내가 알아챘다면, 그래도 오늘과 같은 삶을 살았을까.
오늘처럼 흐느적 흐느적 일어나, TV를 켜고, 밥을 차려 먹고, 컴퓨터 좀 만지작거리다가, 간식 먹고, 다시 TV를 켜고, 밥 먹고, 다시 컴퓨터 켜고, 지금처럼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었을까.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들 때까지 홀로 있는 시간이 내 인생의 전부라면 난 어떻게 그 하루를 보낼까.
우선 하지 않을 것 부터 생각해보자.
더 이상 내게 의미 없는 책은 읽지 않을 것이고, 해봤자 소용없는 운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포탈 사이트 뉴스도 몇개 읽다 부질없음을 알고 그만 둘 것이다. 하고 있던 위닝 리그도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고, 평소에 즐겨보던 재방송 케이블도 허무함만 증가시킬 것이다.
내가 홀로 할 수 있는 건, 끊임없이 그 사실을 거부하며 믿지 않으려는 노력. 아는 사람과 통화해 그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겠지. 다급한 상황에서, 거짓 기억을 떠올려 성욕은 풀려고 할 것이고, 가진 돈을 다 털어 거짓 기억 속의 먹고 싶었던 음식을 찾아 먹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그 맛을 다시 맛보는 것이라 의심하며. 아니 사실 그럴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뚜렷한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로 절레 지을 것이다. 내가 썼다고 생각했던 블로그 글들을 읽어가며,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서랍속의 물건도 꺼내보며,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인지하고, 그 어떤 일도 허무하게 느껴져 모든 일을 그만두고 망연자실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 의미 있는 건, 그래도 오로지 나를 남기는 것, 내가 여기 살았노라고, 이 모든 기억이 품고 있는 인생을 살은 것이라고, 주위의 종이에 컴퓨터 속 블로그에 남기겠지. 누구를 사랑했었다고. 누구를 그리워했다고. 거짓 기억일지라도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고.
*
우리는 어쩌면 매일 매일 새로 태어나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놀음일지라도 매일 새로운 기억을 가지며, 다시 태어나는지 모른다. 우리에겐 하루가 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무하게 시간을 보낼 순 없다. 그렇지만 그냥 하루하루를 흘려버리는게 현실이다. 똑같은 일상 속에, 변하지 않은 관성 속에, 그렇게 다시 잠든다. 설사 하루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라도 기억의 잔여물로 그렇게 똑같은 하루를 보낼지도 모른다.
뜬금없지만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홀로 보내는 하루 뿐일지라도,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은 그 날 하루 한편의 작품에 열중할 것이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음악에, 시를 짓는 사람은 한편의 시를 남기고 잠에 들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 할 것 같다. 하나의 작품을 남길 수 있다면, 비록 거짓 기억에 의존했다 할지라도, 그 이전에 없었던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의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생도 하루가 길어진 것일 뿐 별반 다르지 않다. 단, 다른 점이 있다면 홀로 하루는 보낼 수 있지만, 전 인생을 홀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일 뿐. 그래서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게 앞서의 가정과 다를 뿐이다.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나자.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감사하자. 기억이라는 일상에 속박되지 않고, 잊지 못할 기억을 하나씩 만들어가며 그렇게 하루를 살자. 굳어가는 하루를 보내는 내 자신에게 말하는 바람이다. 내일 아침에 이 글을 떠올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