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주 오랜 엊그제 만들기

아래글은 스팸뮤직을 통해 썼던 글이다. 노래 신청 부분은 지우고, 실명 거론 부분도 지우고, 일부 문단의 순서를 수정했다.

:::::::::::::::::::::::::::::::::::::::::::::::::::::::::::::::::::::::::::::::::::::::::::::::::::::::::::::::::::::::::::::::::::::::::::::::::::::::::::::::::::::::::::::::

일정한 간격으로 고동을 치다가 가끔씩 빨라지기도 하면서 심장은 계속 펌프질을 합니다. 그리고 그 리듬이 끝이 나면 뇌 속의 기억들은 휘발되어버리고 '나'는 없어집니다. 마치 아주 긴 변주곡이 끝을 맺듯이 리듬이 끝남과 동시에 생도 끝이 납니다.
가슴에 잠시 손을 얹고 그 음악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며 스팸뮤직 시작하겠습니다.

제대자들이 소감을 말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멘트가 있습니다.
일명 '엊그제'멘트인데, 처음 전입온지 엊그제 같다는 말을 하는 제대자가 꼭 있습니다.
도대체 그 놈의 엊그제는 언제를 말하는 건지, 당장 엊그제 피티하고 서젼타임한 남은 부대원들은 '에~이~'야유를 보냅니다. 첫째로는 너무 진부한 표현이기에, 그러고 두번째로는 엊그제는 솔직히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도 제대할 때가 되면 2년이 풀쩍 지나가버렸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엊그제라고까진 느끼지 않지만, 이병 때부터 지금까지도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아서 깜짝 놀랍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도 그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왜 그 순간을 겪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나고 나면 짧게 느껴지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제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책을 발견하고 당장에 사서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가는가"(다우베 드라이스마 저) 라는 책에서 가설로나마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설명은 상식 수준이었지만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습니다.

책 속 여러 설명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 '시간의 이정표' 효과입니다.
책 안에서 인용된 다른 책의 문구를 따면,
"우리는 기억 속의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알아내려 할 때, 발생 시기가 잘 알려져 있는 사건들을 표식으로 이용한다"고 합니다.
이 표식들은 "일상적인 사건들, 집안의 중요한 일, 개인에게 있어 큰 변화"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보통 날짜나 특정 시기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경험들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 중에는 각종 첫경험이 많습니다. 처음 입대한 날, 처음 전입온 날, 처음 친구를 만난 날, 처음 키스한 날 등등.
그것이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벗어낫던 일, 예를 들어 여행, 캠핑, 훈련 등등이 차지할 것입니다.
이 표식들은 우리가 지나온 길의 이정표나 푯말 역할을 하며, '기준점' 혹은 '시간의 이정표'등으로 이름 붙여집니다.
다채로운 삶을 산 사람일수록 이런 표식들이 많을 것입니다.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날이 결국에 왔을 때 그 당혹감과 허무함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돌아 회상할 때 시간이 허무하게 빨리 갔구나라고 느낄 수도 있고,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간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얼마나 다채로운 경험을 많이 했는가, 얼마나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을 많이 했는가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해가 아주 길게 느껴지는 것도 대형사건이 많아 표식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하나 살면서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지루한 하루는 겪을 때는 엄청 길게 느껴지다가 지나가보고 나면 한 거 없이 금방 지나가있고, 이런 저런 일이 많은 하루는 금방 지나가는데 지나고 나면 한참 오래 전 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의문도 '시간의 이정표' 효과를 생각하면 쉽게 설명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무료하게 보낸 하루는, 지루해서 현재의 시간은 천천히 가는 것 같지만, 아무런 특징이 없기에 지나보면 금방 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별의 별 일이 다 있었던 하루는 정신없이 금방 지나가지만 지나보면 아침에 있었던 일은 어제 있었던 일처럼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현재의 시간의 속도를 추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조건과 과거를 추정하는데 미치는 조건은 다릅니다.
아주 고통스런 일상으로 매일이 길게 느껴지더라도, 변화가 없는 일정한 고통이라면 지나보면 금방 지나간 걸로 느껴집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기억 될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이 쉴새없이 몰아치는 상황이라면 다르지만 말입니다.)
변화가 없는 일상은 지나고 나면 축약되어 추상적인 기억으로 변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피씨방에 가서 자주 게임을 했었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군생활을 엊그제처럼 느낀다는 것은, 혹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사이에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일이 많이 없었기 때문일 확률이 큽니다.

2년 동안의 모든 순간을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없기에 누구나 지나보면 짧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다채로운 표식이 많다면,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짧게 느끼진 않을 것입니다.
전입온 지 얼마 안 된 부대원, 얼마 남지 않은 부대원, 일상을 벗어나는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오래 각인 될 수 있는 추억들을 군대에서 많이 남기길 바랍니다.
그래서 군대를 떠날 때는 여기 온지 아주 오래 된 것 같다고, 오래 있던 정든 곳을 떠나서 아쉽다고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