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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하나하나에 심리가 회전하는 스포츠, 야구

위기 뒤에 찬스가 오고, 찬스를 살리지 못하면 위기가 온다는 것은 어느 스포츠에서나 정설이다.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가 실패했을 때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려지기 마련이다. 그 틈을 타서 공격을 펼치면 찬스로 이어질 때가 많다.

야구도 마찬가지지만 조금 특별하다. 야구는 공수교대를 하기 전에 쉬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이유로 찬스 뒤 위기를 맞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복잡하게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가 야구이다. 

이전 수비에서 호수비를 하고 다음 공격 이닝에서 처음 타자로 나온다면 희안하게 안타가 잘 난다. 통계적인 자료는 없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내가 본 야구 게임에서는 대체적으로 그랬다. 해설가들도 한 목소리로 호수비가 다음 타석에서 좋은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야구는 '부담의 스포츠'라고 어색하게 이름 붙이고 싶다. 부담을 얼마나 더느냐가 실력 발휘에서 중요하다. 그 이전 이닝에서 좋은 수비로 안타 하나를 막았다면, 부담을 덜고 다음 타석에서 자기 스윙을 할 수 있다. 만약 실책을 했다면 그 반대로 작용할 것이다. 어느 스포츠나 앞서 실수를 했으면 다음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지만, 야구처럼 정신적인 요소가 많은 스포츠에서는 그 영향이 더 크다.

야구는 부담의 스포츠이다. 1점차와 2점차, 3점차가 투수에게 주는 부담의 차이는 상당하다. 다른 스포츠, 예를 들어 축구에서도 1:0 과 2:0, 2:1, 3:0 점수에 따라 부담의 정도가 다른 건 당연하지만, 야구는 특별하다. 1점차는 3루에 주자만 두면 희생플라이나, 투수 폭투로도 동점을 만들 수 있지만, 2점은 안타 하나가 더 필요하다. 수비 입장에서 2점차는 주자 하나를 내보내도 홈런이 있기에 불안하지만, 3점은 주자 한명 정도는 괜찮다. 단순히 골을 넣으면 득점을 하는 일반적인 스포츠와 달리 득점 방법이 다양해서 1점의 차이가 큰 것이다.  

그 뿐인가, 1볼, 2볼, 1스트라이크 3볼, 2스트라이크 3볼, 볼 카운트에 따라 부담의 정도가 다 틀리고 또 만루냐 1루가 비어 있느냐 채워져있느냐에 따라서 부담의 정도는 달라진다. 그 부담감을 극복하고 원하는 곳에 공을 던져야 한다.

또 신기한 건 실책이 나면 희안하게 점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책으로 1루에 진루하면 불안하기 그지 없는데, 그 불안은 현실이 될 때가 많다. 그냥 볼넷으로 나가거나 안타로 나가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는 투수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힘이 빠진다. 실책 이후에 주자가 계속 불어난다면, 자꾸만 실책 생각이 떠오르고 더 흔들릴 것이다. 실책 한두개만으로도 다 이긴 게임을 놓칠 수 있다.

야구는 분위기를 유달리 많이 탄다. 그 이유는 투수의 존재라는 다른 스포츠와의 차이다. 농구, 축구, 핸드볼, 배구 등은 공격하는 팀이 공을 가지며, 수비는 그들의 공격을 방어한다. 농구, 핸드볼, 배구는 상대편에게 점수를 먹어도 바로 자신에게 공격권이 돌아오며, 그 때 침착하게 하면 된다. 축구는 아무리 분위기를 뺐겼더라도 골만 안 먹히면 아무 문제 없다. 심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쪽은 수비쪽 보다는 공격쪽이다. 수비는 사람을 쫓아다니거나 공을 지켜보는 것이지만 공격은 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스포츠는 분위기가 넘어가더라도 수비에 다시 집중할 수 있으며, 정 안 되서 먹혀도 (축구는 치명적이지만 축구를 제외하면) 자신에게 다시 공격권이 넘어오고 분위기 반전을 꾀할 수 있다. 슬램덩크에서 '디펜스', '디펜스'를 외치는 것은 수비 성공으로 흔들린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구는 투수가 있다. 투수의 공에서 모든 플레이가 시작된다. 그런데 투수는 심리적인 존재이다. 야구는 수비하는 쪽이 공을 가지고 투수가 일종의 공격을 하는 것이다. 공을 다루는 쪽은 심리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고, 흔들리기 시작하면 제구가 안 되고 제구가 안 되면 끝이 없다. 숨을 돌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코치가 올라간다던가, 투수를 교체한다던가 하는 다른 방법으로 분위기를 끊으려 한다. 공을 다루는 쪽이 수비라는 것이 야구가 유달리 분위기를 많이 타게 만든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처럼 시간제도 아니고, 점수제도 아니고, 공격이닝제이다. 만약 야구가 시간제나 점수제였다면 분위기를 한번 잡은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그랬다면 분위기를 타는 야구는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수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더라도 9회 이전 까지는 언제라도 분위기를 잡을 기회가 온다. 분위기를 타는 특징과 이닝제는 절묘한 궁합으로 야구만의 특별한 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