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섯다'인지 '섰다'인지 '섣다'인지 정확한 명칭은 알지 못한다.
아무튼 군대에서 병장을 달고 쯤 부터 2개월 정도 섯다를 쳤다. (그 이후로는 제대할 때까지 고스톱을 쳤다)
나는 얼굴 표정에서 패가 다 드러나고, 돈을 잃는 게 겁나기도 해서 처음에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한 번 쳐보니, 재미가 쏠쏠하다. 표정을 못 숨기는 걸 이용하기도 하고, 소심한 성격을 이용하기도 했다. 결과만 놓고 따지자면 처음엔 좀 퍼주다가, 하루 날 잡고 따다가, 고만고만하다가 결국 약간 돈을 잃었던 것 같다. 어차피 판돈이 100원이라 크게 잃지도 않는다. 섯다는 돈의 회전이 빨라서 잃어도 금방 다시 찾을 수 있다. (반면 고스톱은 한 번 크게 잃으면 만회하기가 어렵다. 맞고가 아니라면.)
섯다의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는 돈을 따고 잃는 건 그냥 운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패의 위계에 따라 돈을 걸 뿐이니 경우의 수도 얼마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이걸 무슨 재미로?
1. 섯다에서 유래된 말, "끗, 땡'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은어, 속어) 중에 섯다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섯다에서 쓰는 용어도 결국 일상언어로부터 왔을테지만, 섯다에서 뜻이 정교화되고 굳어져버렸다고 할까. 어쨌든 섯다를 치다보면 아, 이래서 그렇다고 하는구나 하는 것들이 많다.
"한 끗 차이" - 섯다에서 두 패을 더해 나오는 숫자의 뒷 자리를 끗이라고 한다. 패가 3월과 9월이 나왔다면 그 패는 2끗이 된다. 이 끗이 섯다 패의 위계의 최소단위다. 한 끗 차이로 졌을 때는 한 단위 차이로 진 것이다. 섯다 패의 위계가 대략 30개가 조금 안 된다고 할 때, 핸드볼에서 한 점차로 졌을 때의 느낌이라고 비교하면 될까? 아무튼 무지 아깝게 진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한 끗 차이'는 원하는 것에 조금 모자라게 놓쳤을 때 쓴다.
"끗발" - 화장발, 조명발, 사진발, 머리발 할 때 그 발이다. 패가 잘 안 들어온다는 말이다. '땡'은 커녕 끗도 안 좋다고 할까. 일상에서 "끗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끝발"인 줄 알았다. 마지막에 잘 안 된다는 말인 줄 알았다. 끗도 두 숫자를 더한 뒤, 뒷자리를 말하는 것이라 비슷한 뜻일 수는 있겠다.
"땡 잡았다" - 이 말은 정말 많이 쓴다. 특히 어렸을 때 많이 썼다. 지금도 꽤나 쓴다. 처음 땡 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땡그랑 하는 동전 소리를 연상시켜 "돈 잡았다", 금전운을 비유한 말인 줄 알았다. 섯다에서 땡은 가장 높은 패들을 말한다. 같은 달(月)의 패가 들어오면 땡이다. 1월 두패가 들어오면 1땡, 10월 두 패가 들어오면 "장땡"이다. 그리고 3월과 8월 광이 들어오면, 그 말로만 듣던 38광땡이다. 그 패가 들어오면 흥분을 참느라 괴롭다. 땡 잡았다는 이 땡 패가 손에 들어왔을 때를 말한다. 땡을 잡았다면, 일단 자기가 제일 패가 좋을 확률이 높다.(어중간한 1땡이라도 흥분된다) 그러니 땡 패가 들어왔을 때 적절히 배팅을 잘한다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땡잡았다는 말이 나올만 하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패 중에 "땡잡이"라는 패가 있다. 멧돼지 7과 3광을 잡았을 때를 말하는데, 이 때는 상대방 중에 땡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땡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배팅했다가 패를 벗겨봤는데 상대가 땡이 없으면 제일 낮은 패가 된다. 3+7=10, 0끗, 즉 망통이다. 땡잡이를 잡고 끝가지 배팅을 하여 땡을 잡았을 때의 기분은 땡으로 큰 돈을 먹었을 때보다 더 좋다. 거기서 땡 잡았다는 말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쓰이는 상황을 봤을 때 땡패가 손에 들어왔을 때를 일컫는 것 같다.
"땡보" - 군대에 가면 정말 미친듯이 많이 쓰는 말이다. 남이 편한 건 왜 그렇게 배를 아파하는지 말이다. 어쨌든 이 땡보도 '땡 잡은 보직'이라는 말의 준말이라는 설이 있다. 또 하나 '만고땡 보직'의 준말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렇다 할지라도 역시 거기서 땡은 요 땡을 말한다.
2. Degeneracy 1
섯다는 패들의 위계가 정해져 있다. 땡은 하나씩 밖에 나올 수 없지만, 족보(끗과 땡 사이의 특수패)와 끗으로 내려가면 같은 값의 패들이 나올 수 있다. 패를 깠는데 같은 패가 나오면 배팅한 돈을 그대로 묻고 두 사람만 연장전을 하거나, 돈을 가른다. 다양한 상황이 나오려면(그래야지 머리를 많이 굴리게 된다), 이 패들의 위계를 복잡하게 만들어놔야 한다. 단순하게 수직적인 위계만 있다면, 그건 숫자를 적어놓고 제비뽑기를 하는 것처럼 재미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장 낮은 패나 가장 높은 패, 그러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패들을 줄여야 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패가 0끗이 나왔다. 이 때는 뻥카(패가 잘 나온 척 과감하게 배팅 하는 것)말고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러니 그냥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그냥 죽어버리는 사람이 많으면 게임은 재미 없어진다. 1끗, 2끗, 3끗, 한 5끗까지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돈을 따기 힘들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게임을 하다보면 이 패들은 확률상 대략 1/3 정도는 나오게 된다. 패를 보자마자 결정되는 게임은 재미없기에 섯다도 여기에 변이를 준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땡잡이'도 그 중 하나이다. 그냥 끗으로 치면 망통(0끗)이지만, 상대방이 땡을 들고 있으면 그 순간 가장 높다. 이 외에 비슷한 패로 구사파토가 있다. 구월 쌍피와 4월 패가 들어오면 그 판은 나가리다. 다만 장땡 이상 들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파토를 낼 수 없다. 9+4는 원래 3끗밖에 안 되지만 이 패를 들면 막나가서 상대방을 죽게 만들 수 있다. 그 외에 앞서 말한 족보라는 것이 있다. 족보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마 초보자들은 외우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아무튼 이 족보 중에는 특이한 것이 많다. 1+2, 1+4, 1+9, 10+4 다들 끗으로 따지면 5 끗 이하지만 모두 9끗보다 높다. 같은 0끗이라도 1+9나, 3+7, 혹은 10+10으로 0끗이 되면 0끗이 아닌 것이다. 이런식으로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패들을 줄여나가 게임의 흥미를 높인다.
섯다에서 가장 높은 패는 38광땡인데 이 패를 들면 어떤 패도 이길 수 없다. 장땡은 (지역마다 다르나) 37 땡잡이가 잡을 수 있지만 38은 이미 자기가 3광을 들고 있기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니 38광땡을 잡으면 절대 안심해도 된다. 무조건 자기가 먹는다. 장땡 부터는 확신할 수는 없는데 (지역에 따라) 37이 자기를 잡을 수도 있고 38광땡한테 질 수도 있다. 9땡을 잡으도 마찬가지고, 8땡부터는 파토까지 날 수도 있다.(대신 38광 땡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같은 끗이지만 변이를 주면서 게임을 더 흥미롭게 할 수 있다. 절대 무적 38광땡 같은 패가 하나 정도 있는 것은 쾌감을 위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머지 패들 중 절대적 패, 절대적으로 이기거나, 절대적으로 지거나 하는 패는 적을 수록 재미있다. 섯다에서 족보나 다른 패들을 만든 이유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3. 부록 - 고스톱
섯다가 정말로 운칠기삼이라면 고스톱은 운칠력삼(운이 7, 실력이 3) 정도 될 것이다. 판수가 늘어갈 수록 실력의 비중이 커지고, 무한대로 보내버리면 실력이 10을 차지할 것이다. 판수가 많아지면 패의 변수가 없어지고, 그 때는 어떻게 패를 관리하느냐 하는 실력만 남는다. 섯다에서 실력이란, 얼굴 표정을 포함한 심리전이지만, 고스톱은 심리전 더하기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이다. 어떤 최적화된 전략을 구사하느냐에 쌈짓돈의 운명이 달려있다. 그런 전략들을 매뉴얼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그 매뉴얼 대로 우선순위를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론에서 컴퓨터끼리 최적의 전략을 향한 무한 대결을 펼치게 하는 것처럼, 고스톱도 참가자를 받고 각자의 매뉴얼화된 전략을 붙여 놓으면 어떤 기본 원칙이 승리하게 될지 궁금하다. 전략의 명령 수를 몇 가지로 제한한다면 더 재밌을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혼자서라도 여러 전략을 만들어, 최적의 전략을 찾은 뒤, 명절 때를 기다리는 것도 쏠쏠할 것이다.
- 양자 역학에서, 하나의 에너지 준위(準位)에 대하여 두 개 이상의 상태가 존재하는 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