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개념은 상태가 바뀌거나 모양이 변형되더라도 크기나 양은 그대로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물컵에 담겨 있던 물을 넓은 대접에 담아도 물의 양은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보존개념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보존개념에는 수의보존 개념, 길이의 보존개념, 무게의 보존개념, 부피의 보존개념 등이 있으며 각각은 다른 연령대에서 확립된다. 예컨데 액체에 대한 보존개념이 확립되기 전의 유아는 좁은 컵에 담겨있던 물을 넓은 컵으로 옮기면 물의 양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Piaget는 전조작기의 유아가 보존개념을 획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몇가지 들었다. 두 개 이상의 차원을 고려하지 못하는 중심화(centation), 지각적 특성에 의해 판단하는 직관적 사고, 바뀌는 상태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 비논리적 사고의 특징인 비가역성 등이다. 1
이 중 주된 이유는 중심화와 직관적 사고다. 특히 직관적 사고는 지각과 경험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차분히 따져봐야 아는 보존성을 간과하기 쉽다. 이미 보존개념이 정립된 후에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직관적인 사고가 보존성과 상반되는 결론을 내리기 쉽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인류 전체의 집단 지식의 측면으로 보더라도 보존개념은 특정 시점에야 확립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움직이는 물체는 외력을 가하지 않으면 멈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직관적인 사고이다. 지각의 경험에 따른 결론이다. 그러나 이는 틀린 사실이다. 마찰이 없고 외력이 없다면 모든 물체는 움직이던 방향 그대로 같은 속력으로 움직인다. 갈릴레이는 사고실험을 통해 운동량 보존개념(관성의 법칙)을 정립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마찰력 등의 다른 요소를 생각지 못하는 중심화와 경험에 바탕을 둔 직관적 사고 때문에 보존개념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 뿐일까. 대야에 받아 놓은 물은 가만히 두면 마른다. 줄어든 물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마 물은 조금씩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대로 샘솟는 우물근처의 사람들은 물이란 계속 생겨나는 것이라 오랫동안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액체, 기체 등의)분자의 상태와 물의 순환에 대해 알고 있는 현재는 그것이 보존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종의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여기 있는 물질이 어디론가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너지 보존개념이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은 제 1종 영구기관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매달렸다. 에너지의 변화에 대한 고려, 즉 바뀌는 상태를 고려하지 못했기에 보존개념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직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이처럼 보존개념을 쉽게 깨달을 수 없다.
"아니 왜 유아들은 물을 다른 그릇에 옮겼다고 해서 물의 양이 달라진다고 생각할까"라는 의문에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적절하다.
보존개념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다. 보존개념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경험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보존개념이 생기기 위해서는 실험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물을 다시 원래 그릇에 부어보며 보존된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하듯이 말이다. 실험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넓히게 되고 새로운 직관을 갖게 된다.
앞서 질량 보존과 에너지 보존을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이 둘 다 질량-에너지 보존법칙으로 수정해야 한다. 실험적 경험을 통해 질량과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직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직관은 형성되고, 보존개념 또한 (반복된 혹은 통제된)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기에 (사고 실험을 통해서조차) 경험할 수 없다면 개념은 생길 수 없다. (사고 실험 또한 이미 경험한 것을 쪼개고 합치는 과정이다.)
반복하자면 보존개념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며, (경험에 바탕을 둔) 직관적 사고와 상반될 수 있다. 우리는 축적된 경험 혹은 통제된 경험을 통해 보존개념을 새로운 직관으로 받아들인다. 비록 보존개념이 소량의 경험과는 배치될지 모르지만 다량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직관으로 정립된다. 경험의 범위(scope)가 넓어지면서 보존개념도 더욱 사실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개인'과 인류라는 '집단'에 있어 유사하다.
보존개념은 획득 후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렇지 않았던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었다.
Piaget는 전조작기의 유아가 보존개념을 획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몇가지 들었다. 두 개 이상의 차원을 고려하지 못하는 중심화(centation), 지각적 특성에 의해 판단하는 직관적 사고, 바뀌는 상태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 비논리적 사고의 특징인 비가역성 등이다. 1
이 중 주된 이유는 중심화와 직관적 사고다. 특히 직관적 사고는 지각과 경험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차분히 따져봐야 아는 보존성을 간과하기 쉽다. 이미 보존개념이 정립된 후에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직관적인 사고가 보존성과 상반되는 결론을 내리기 쉽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인류 전체의 집단 지식의 측면으로 보더라도 보존개념은 특정 시점에야 확립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움직이는 물체는 외력을 가하지 않으면 멈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직관적인 사고이다. 지각의 경험에 따른 결론이다. 그러나 이는 틀린 사실이다. 마찰이 없고 외력이 없다면 모든 물체는 움직이던 방향 그대로 같은 속력으로 움직인다. 갈릴레이는 사고실험을 통해 운동량 보존개념(관성의 법칙)을 정립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마찰력 등의 다른 요소를 생각지 못하는 중심화와 경험에 바탕을 둔 직관적 사고 때문에 보존개념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 뿐일까. 대야에 받아 놓은 물은 가만히 두면 마른다. 줄어든 물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마 물은 조금씩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대로 샘솟는 우물근처의 사람들은 물이란 계속 생겨나는 것이라 오랫동안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액체, 기체 등의)분자의 상태와 물의 순환에 대해 알고 있는 현재는 그것이 보존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종의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여기 있는 물질이 어디론가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너지 보존개념이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은 제 1종 영구기관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매달렸다. 에너지의 변화에 대한 고려, 즉 바뀌는 상태를 고려하지 못했기에 보존개념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직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이처럼 보존개념을 쉽게 깨달을 수 없다.
"아니 왜 유아들은 물을 다른 그릇에 옮겼다고 해서 물의 양이 달라진다고 생각할까"라는 의문에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적절하다.
보존개념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다. 보존개념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경험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보존개념이 생기기 위해서는 실험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물을 다시 원래 그릇에 부어보며 보존된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하듯이 말이다. 실험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넓히게 되고 새로운 직관을 갖게 된다.
앞서 질량 보존과 에너지 보존을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이 둘 다 질량-에너지 보존법칙으로 수정해야 한다. 실험적 경험을 통해 질량과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직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직관은 형성되고, 보존개념 또한 (반복된 혹은 통제된)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기에 (사고 실험을 통해서조차) 경험할 수 없다면 개념은 생길 수 없다. (사고 실험 또한 이미 경험한 것을 쪼개고 합치는 과정이다.)
반복하자면 보존개념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며, (경험에 바탕을 둔) 직관적 사고와 상반될 수 있다. 우리는 축적된 경험 혹은 통제된 경험을 통해 보존개념을 새로운 직관으로 받아들인다. 비록 보존개념이 소량의 경험과는 배치될지 모르지만 다량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직관으로 정립된다. 경험의 범위(scope)가 넓어지면서 보존개념도 더욱 사실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개인'과 인류라는 '집단'에 있어 유사하다.
보존개념은 획득 후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렇지 않았던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었다.
- 1. 정옥분, 발달심리학, 학지사, 200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