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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글, '실낱'에 대한 설명

밑의 글에 '뭔소리야...'라는 댓글이 달려 이 글을 쓴다.
저렇게 뭔소린지도 모르게 뭔가 아는 척하며 글을 쓴 이유는, 뭔가 있긴 한데 나도 그게 뭔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정리가 되면 길게 뭔 소린지 알게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달긴 달아야겠고, 댓글로 달기에는 너무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나도 아직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적어보기로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이라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들이 거대한 우주 범선을 만들어 다른 행성을 새로운 인류의 희망을 안고 찾아간다. 베르나르의 소설들에서는 절망적인 인류의 행태들이 자주 서술된다. 특히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을 통해 그 절망을 표현한다. 전쟁과 테러는 끊이지 않고, 세계의 모든 인구가 먹고도 남을 식량이 있지만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고, 무리한 사육으로 인한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과, 조금씩 녹아가는 빙하와 함께 차츰 드러나는 지구 온난화의 재앙 등등. 지구에서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지금 당장 중동 지역을 봐도 그들의 대립에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내가 발 디디고 있는 한국만 봐도 학벌주의, 천민 자본주의, 지역 주의, 마초 문화, 빈부 격차, 어느 하나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는가. 물론 그래도 세상은 삐걱삐걱 돌아갈 것이다. 처음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삐걱거리며 온 것이다. 지구 온난화니, 에이즈니 해도 인류는 꽤나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선, 악의 가치는 없다. 무엇이 옳으며, 어떻게 인류가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 따위는 없다. 자꾸만 존재하지도 않는 가치를 따진다면, 모순만 만들 뿐이다. 나는 그저 생명체라는 우주의 희생물이 그래도 고통을 최소화하며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 길은 너무 멀어보인다.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있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현실주의라는 말이 있는지 이제 조금씩 알 것 같다. 세상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세상이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여전히 절망적이다.

오쇼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읽진 않았지만 붓다와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등등. 흔히 그들은 깨달은 자들이다. 깨달음 이후에 그들은 고통을 최소화하면 살 수 있었다. 그들은 왜 세상에 고통이 끊이질 않는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 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덜어준다. 그들은 명상을 했다. 어떠한 판단없이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했고, 왜 인간이 고통 받을 수 밖에 없는지를 깨달았다. 명상이 텔레비전에서 보듯이 스님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어떠한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 없이 자신을 관찰하는 것, 그래서 관찰하는 순간 자신이 사라짐을 느끼는 것, '자신'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 자신의 고통이 생각과 기억에서 온다는 것, 그것이 명상이다. (내 말을 못 믿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들이 한 말이다.)

이 명상은 자기 자신의 고통만을 더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최소한 개인은 구할 수 있다. 언젠가 나는 모든 사람들이 붓다처럼 깨달은 세상을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진보와 보수'라는 글에서 말했지만 통계적으로 영적인 능력 또한 모두가 동등히 지닐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이나마 명상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평균적으로 더 명상을 많이 하게 된다면, 세상은 더 나아지리라 '믿고' 있다. (근거 없이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사람들이 명상을 더 많이 할 수 있는가. 항상 '무엇'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가 문제이다. '어떻게'에서 절망은 찾아온다. 그런데..

진화의 법칙 중 하나는 에너지 최소화이다. 진화는 에너지 소비량을 최소화하려 한다. 한정된 자원에서 당연히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 하는 것은 생존에 유리함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귀차니즘은 괜히 있는게 아니다. 그것 또한 에너지 최소화의 원리를 따라서 진화해 온 것이다. 괜히 잔디밭에 없던 길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더 짧은 방향으로 더 에너지를 적게 쓰고 가기 위해 없던 길이 생긴다. 물론 이 원리는 한없이 귀찮아해서 생존에 필수적인 일도 안하게는 못하도록 스트레스를 주어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에너지 최소화와 스트레스를 통해 에너지 최적화의 선을 따라 진화는 이루어진다. 어쨌든, 끊임 없이 몸은 편하고 싶어한다. 만약 삶에 지장 없이 몸이 마음껏 편해질 수 있다면 인간은 그렇게 할 것이다.
명상은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순간 순간 명상의 기쁨을 느껴 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깜짝 놀라 생각이 멈출 때, 언어가 사라질 때 우리는 에너지가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다. 명상은 단연컨데, 정신의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상태이다.

이것이 내가 거는 실낱같은 희망이다. 에너지가 최소화되는 그 기쁨을 사람들이 느끼게 해줄 수 있다면, 그래서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유전자의 욕망을 자극 할 수 있다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세상을 바꾸려는 그 수많은 시도가 실패했듯이, 언제나 또 '어떻게'에서 막히게 될 것이다. 그래도 막연한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