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투project는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자기를 "던지는" 인간 실존의 존재 방식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이데거 존재론의 중요한 개념이자 또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을 이루는 개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한편으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 즉 피투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 즉 기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피투와 기투는 사르트르의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피투된 존재, 따라서 본래적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본질도 없는 "부조리한" 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즉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그 자신이 절대적인 자유로서,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선택하고 기투하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르트르의 급진적인 무신론은 바로 이러한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의미가 없음)과 기투에 근거한다."
-역자주석, 사르트르, <지식인의 변명>(이학사, 박정태 역), 17p
윗 글은 <지식인의 변명>(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이학사)에서 '기투'에 달린 주석이다.
"인간은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피투된 존재, 따라서 본래적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본질도 없는 부조리한 존재".
만약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래서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창발한 존재라 생각한다면 인생에 어떤 의미도 붙일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태어났기에 살아갈 뿐.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어떤 선택에도 자유롭다. 왜냐하면 하늘이 내린 '소명'이라던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도킨스가 말했던) 우리는 '유전자'들의 생존기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앎으로써 역으로 유전자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생에 의미란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제약 조건 또한 없는 것은 맞지만 나는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부모님에게서 빚을 많이 졌고, 그 빚을 갚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화 과정을 품고 태어났기에 욕망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아는 것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다. 나의 행동, 성격, 사고 등을 분석하여 그 이유를 알게 되더라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다.
본래적인 것이 없는 인간. 욕망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 욕망이 존재하는 이유는 알지만, 본래적으로 그 욕망은 내 것이 아니다. 욕망 덩어리가 움직이고 있을 뿐. '나'라는 자아의 존재감은 너무도 가볍다. 두려움에 약하다. 우리는 피투된 존재이자 미래로 던지는 기투하는 존재라는 말은 내게는 반쪽만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