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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빡세다'의 의미는?

스팸뮤직을 통해 쓴 글이다. 거의 수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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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스팸메일은 평소 계속 생각해오던 군생활에 대한 '사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에 관한 것입니다.
언어는 분절이고, 범주이고, 가치체계입니다.
그 용례가 불분명하고, 이중적일 때 혼란이 생기고 오해가 생깁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중적인 용례가 실제 현실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우리부대에서 정말 자주 쓰는 단어가 '빡세다'와 '빠졌다'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다 아실 겁니다.
'빡센' 부대원이 있고, '빠진' 부대원이 있다고들 합니다.
자 빡센 부대원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대충 몇 명 눈 앞에 어른거립니다.
빠진 부대원 또한 마찬가지로 떠오릅니다.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분류하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인 것이지만, 우리 뇌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분류화를 자동적으로 하게 됩니다.

'빡세다'는 단어는 '힘들다'는 말의 속어입니다. 보통 대학교 다닐 때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투자할 시간이 많으면 그 수업은 '빡세다'고 말합니다.
군대에서는 '군기가 많이 들었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졌다'는 단어는 '군기가 빠졌다'는 말을 줄인 것입니다.
군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부대의 전투력의 감소를 초래할 정도로 해이해지거나 유순해진 것을 말합니다.
'빡세다'와 '빠졌다'는 반대 뜻을 지닌다고 풀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어들을(특히 빡세다는 말을) 사용하는 걸 들을 때마다 불편했습니다. '다른 두 가지 성격'을 같은 단어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어가 가리키는 뜻의 분절이 불명확할 때 답답함을 느끼는데 '빡세다'는 단어가 특히 그랬습니다.

'빡세다'는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됩니다.

첫째는 '선후임간의 예우'를 확실히 갖추는 부대원에게 쓰입니다.
후임은 깍듯한 예의로 선임을 대하며 매사에 자신이 낮은 위치라는 걸 인지하는 인원일 것이고,
선임은 후임에게 그러한 것들을 강조하며, 거기에 어긋나는 후임을 발견시 혼이 날 정도로 야단을 치는 선임일 것입니다.

둘째는 '군에 관련된 업무에 있어 철저한' 부대원에게 쓰입니다.
규정을 정확히 지키려는 부대원일 수도 있고, 일이 항상 우선인 부대원일 수도 있습니다. 귀찮은 것도 명령이라면 철통같이 지키는 부대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미군 NCO 중에서 씨큐 설 때 러너를 안 재워주면서, 자신 또한 안 자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러너 카투사를 가리키며 '빡신 애랑 걸려서 안 됐다'고 합니다.
급하게 끝내야 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남아서 일을 끝내고 오는 사람 또한 빡세다고 합니다.
사무실에서의 일이든 생활에서의 일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을 '빡세다'라고 표현합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용례는 사실 크게 상관이 없는 범주입니다.
첫번째는 아니면서 두번째는 그럴 수도 있으며,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선후임간은 철저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은 별 거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 일은 열심히 하는데 선후임 간의 예의는 별로 신경 안 쓸 수도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함께 섞여서 쓰이면서, 두 종류의 성격의 구분이 애매해집니다.
'그 분 빡센 분이야'라는 말을 하면, 어느 빡셈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거기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빡센척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제일 빠졌다는 둥의 뒷말이 오가기도 합니다.
자기는 쓸데없이 위계적인 군대문화는 원치 않는다고 말하며 지켜야 할 것 까지 안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어의 분화가 완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럼 왜 이 두 가지 다른 뜻이 같은 단어로 쓰이게 됐겠습니까?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원래는 상관없는 두 범주가 한국군대에서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한국군에서는 선임으로부터의 압박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사고가 나는 것은 갈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선임에 대해 예의를 잘 갖추는 사람이 자기 일도 열심히 합니다.
철저한 위계질서가 징병제의 피해의식을 아슬아슬하게 억누르는 기제로 작용합니다.
여기서 선임에 대한 예절은 '군생활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빡셈'은 '편하게 군생활 하지 않겠음'이 되고, '빠짐'은 '편하게 하겠음'이 됩니다.
'빡세다'는 단어가 두 가지 뜻을 합치하는 지점은 여기입니다.

그럼 정말 위로부터의 압박이 없으면 우리는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인가.
다른 각도로 말해 선임에게 빡세던 후임이 정말 제대할 때까지 자기 미션도 철저히 최우선으로 둘 것인가.
전자는 그렇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향'을 말하는 중입니다.)

전자가 그런 이유는 우리가 프로의식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이고, 후자가 그렇지 않은 이유는 선임에게 빡세던 사람은 자신 또한 후임으로부터 그것을 바라게 되고, 위계가 높아지면서 군기는 오히려 빠지게 되는 한국군의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프로의식의 결여는 자율성의 결여를 말합니다.
징병이기에 자율성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자라온 교육이 워낙에 타율적인 원인도 있습니다.
집에서는 교육을 명목으로 폭력을,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체벌(구타)을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어떤 것을 자율적으로 찾아서 스스로하기보다는 시키는대로 하는 것에 더 익숙합니다.
무언가를 혼자 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자기규율에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시키지 않으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타율성의 과잉은 조금의 자율이라도 허락이 될 때 그 빈틈으로 빠지려고 하는 습성을 낳습니다.

그렇기에 위에서의 압박이 필요하게 되고, 위에서의 압박이 통하려면 위계질서가 단단해야 하고, 그래서 위계질서를 강조하게 됩니다. 위계질서를 잘 따르는 사람은 (타율적인 군대에서) 다른 군생활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편하게 대해주면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자율성의 부재' 때문입니다.
(역시 개인이 아니라 평균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첫번째, 선임을 대하는 '빡셈'은 제가 많이 쪼는 성격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고, 두번째 '빡셈'은 잘 안 되지만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후임에게는 첫번째 빡셈은 되도록 강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두번째 빡셈에 대해서는 엄격한 편입니다.(소심해서 야단은 잘 못치고 혼자 못마땅해 할 때가 많지만 말입니다.)

군대에서의 계급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계급이고, 우리는 필요에 의해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기에 선임의 지나친 권위는 필요없다는 것이 제 사견입니다. 그래서 후임에게는 (제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권위만을 남기고 다른 권위는 강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가끔 그 최소한의 권위마저 무너질 때는 기분이 안 좋긴 합니다.ㅋ)

(요원해 보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부대는 선후임에 대한 '빡셈'은 최소한으로 강요하고, 대신 자기 미션에 대한 '빡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군대에서의 대부분의 일은 선임이 지적을 안 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타성에 젖어있어서 그렇지 모두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갈구지 않아도 피티 테스트 알아서 나오고, 갈구지 않아도 자신의 듀티를 완벽히 이행하고, 갈구지 않아도 시간 약속 지키고, 갈구지 않아도 하기 싫은 일에 자원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지킬 것 지키고, 자기 할 일 하는 게 진짜 '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빠졌다'는 말도 그런 것들을 잘 지키지 않는 면에 관해서만 축소해서 썼으면 하는게 제 바람입니다. 언어를 이렇게 하자 해서 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타율성과 징병제의 피해의식이라는 풀에서 얼마나 자율적인 군대가 나올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최소한 불필요한 위계를 없애는 측면에서는 우리 부대도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자율성의 강화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권위가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빡세다'는 표현이 '빈틈이 없다', '권위적이다'라는 두 가지 용례 중 어느 것으로 굳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기 일에서만큼은 빡센 군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지내고, 그래서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라 이런 글을 쓸 때는 항상 두렵습니다. '사견'이라는 말을 붙이더라도, '설득'하려는 의지가 없는 글은 존재하지 않고, 군대에서 불필요한 의견충돌은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열린 의견임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만 덧붙이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대의 모습은 절대 올 수 없으며, 선후임간의 일정정도의 위계와 권위는 결국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속에 그린 최소한의 필요한 권위는 지금과 조금 다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