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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인생 (<무지개를 풀며> 메모)

깨달았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은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마치 영혼과 같은 것이 존재해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존재하라고 한다. 그들은 자아를 부정하지만 삶은 부정하지 않으며, 현재에 존재할 수 있다면 삶은 축복이라고 얘기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삶을 어떻게 아름답게 설명할까. 그가 실제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과학적인 사고로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지개를 풀며> 1장에서 그는 우리가 얼마나 행운아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억 세기 전보다 지구는 노쇠했다. 얼마 안 있으면 태양이 거대한 붉은 덩어리가 되어 지구를 집어삼킬 것이다. 이전의 수억 세대와 앞의 모든 시간들은 '현세'로 불릴 것이다. 내가, 그리고 아마 여러분이 느끼는 현재는 시간의 거대한 잣대 위에서 과거로부터 미래로 조금씩 전진하는 작은 불빛이다. 불빛 전에는 죽은 과거의 어둠이 존재한다. 불빛 앞에는 미지의 미래가 어둠에 잠겨 있다. 당신이 사는 시대가 그 불빛 안 어딘가에 있을 확률은 동전 하나를 던져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 어딘가에 있는 개미 위로 떨어질 확률과 같다. 달리 말하면 죽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확률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엄연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직 불빛이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나 이미 지나간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을 위치에 있지 않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쯤엔 어떨지 모르지만, 나 역시 운 좋게도 책을 쓸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사실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을 때쯤이면 내가 이미 죽었기를 바란다. 오해 없길 바란다. 나는 삶을 즐기고 아직 더 오래 살기를 희망하지만, 모든 작가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저작을 읽길 원한다. (중략) 사실 이 책이 너무 빨리 절판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단순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동안에 알 수 있는 것은 당신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는 사실이다.

-리처드 도킨스(최재천, 김산하 역), <무지개를 풀며>, 바다출판사, 21-23쪽


우주의 장엄한 시간을 생각했을 때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은 얼마나 찰나인가. 앞으로 우주가 지금까지보다 더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의 비율은 가늠하기도 어렵다.
(살아있는 것이 만약 행운이라면) 살아있는 것 이상의 행운이 또 있을까.

사실 도킨스는 말장난을 한 것이다 (도킨스도 알고 있다). 도킨스가 말한대로 우리의 삶을 행운으로 여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시간과 죽고 난 후부터의 시간을 모두 우리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영혼과 같은 존재를 상정해 찰나의 인생만을 인생으로 느낄 수 있어야지 이것은 행운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도 죽고 난 후에도 아무런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그것이 불운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자의식은 완전히 사라진다. 또다른 자의식으로 태어날 수도 없다. 그건 이미 다른 자의식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이게 전부라면 그것은 행운도 불운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행복한 인생과 불행한 인생은 존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무지개를 풀며>는 과학은 차가운 이성의 학문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쪼개고 쪼개 아름다움을 해체해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쓴 책이다.
설사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진화과정을 통해 발생한 찰나의 창발일 뿐이라 할지라도 삶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 경이롭지 아니한가.

신비주의가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경이로울 수 있다. 죽고 나면 그 어디로도 가지 않고 사라지지만 그것이 너무나 두렵지만 그것이 과학을 무정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재에라도 제대로 존재해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