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nanael 2011. 2. 26. 00:58

예전에 누구와 시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가 시인 중에 누굴 제일 좋아하냐는 질문을 들었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이 이성복이어서 이성복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성복의 시집은 딱 한 권 뿐이었다. 시집의 권수가 좋아하는 정도와 비례한다면 황동규를 말했어야 하지만 그 때는 이성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읽었던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 
시집이 강하게 남았었나보다. 들려주고 싶은 시들이 많지만 봄에 관한 시 두 개만 골라보았다.


삼월의 바람은

삼월의 바람은 순하지 않다
연립 주택 옥상에 올라
기저귀를 내거는 뚱뚱한
새댁의 느린 걸음걸이

삼월의 바람은 출정하는 배들의
돛폭처럼, 흰 기저귀 하늘로
밀어올리고 뒤뚱거리는 새댁의 모습
귀지처럼 가볍게 눈앞에 떤다

다만 삭은 빨래집게의 풀어진
힘으로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는
삶, 여러 번 살아도 다시 그리운,


눈에 보이는 듯한 뚱뚱한 새댁의 걸음걸이. 한없이 권태로워 보이다가도 바람에 날리는 기저귀는 짧은 순간 권태를 흩트린다. 풍경을 훔쳐낼 때의 시선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다.



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봄 비 오는 날 흔히 볼 수 있는 보도블록에 붙은 벚꽃 잎이다. 그 수많은 생채기들을 우리는 밟고 지나갔다. 짓이겨져 분홍빛 흉터를 만들었다. 보도블록에 고운 상처를 알려줬지만 벚꽃 잎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올 봄엔 비 그친 인도변에서 올라오는 흉터 아무는 소리를 나도 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