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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훈련소에서의 잡상들

nanael 2007. 8. 9. 09:56

1. 군대는 평등한게 아니라, 불평등해도 불만할 수 없는 강요된 평등이 있을 뿐이다.


2. 군복을 자세히 보면 조금씩 무늬의 위치가 다르다. 단 패턴은 같다. 아주 큰 천에서 잘라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는 그 정도의 개성만 허용 되는 곳이다.


3. 결국엔 나를 찾아간다. 나의 행동패턴 내지 성격을 바꾸지 않는 한 특정한 인간관계 상태로 수렴한다. 나를 변화시킨다면? 그러나 그땐 부자연스럽다.


4. 내가 하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탓한다. 타인에게는 내가 곧 주어진 환경일텐데 말이다.


5. 군대가 견디기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의 뇌를 위해 내 자신의 뇌를 포기하고 그 사람의 팔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6. 총성을 들으며 피어난 꽃들..


7. 한달만 하고 나갈 곳이기에 더욱 후회스러울지 모른다. 베풀어도 금방 잊혀지겠지만 그래서 더 베풀어야 할 지 모른다. 여기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


8. 국가라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그것이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날 강제하는지.


9.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한 사람이 기침을 하면 연달아 기침이 나온다. 기침이 생물학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것도 있음을 말해준다.


10. 시간은 흐르고, 5월이 왔다. 한달이 지나고 이제 또 한달이 남았다. 나는 다른 분대에 있었고, 거기엔 내가 없었다. 아니 여기에서 조차도 나는 없었다. 고통은 기억을 남긴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 현재에 존재하기란 힘들고 미래에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자대로 가면 다시 일주일이 천천히 갈 것이다. 나는 뭘 배웠는가. 육체적 고통을 참는 힘? 내 의지가 아니라 강요이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한 성장, 내겐 의미 없다.


11. 깔깔이(방상내피)는 그 어떤 옷보다 따뜻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옷이 따뜻하다고 할 때 그 어떤 옷도 열을 내지는 않는다. 우리 몸에서 나는 열을 가둬두는 역할을 할 뿐. 결국 우리는 우리가 내는 열만으로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다.


12. 거미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거미는 날고 있다고, 공중에 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이 세상을 나는 것들은 사실은 거미처럼 보이지 않는 줄을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13. 군대에서 가장 참기 힘들 때는 보람이 없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할 때이다. 무의미한 일. 나에게 뿐만 아니라 부대에조차 무의미한 일. 오전에 턴 모포를 오후에 또 턴다든지, 물이 계속 나오는 바닥의 물을 쓸어내라든지. 콩쥐가 된 기분? 군대는 사람을 콩쥐로 만든다.


14. 사람과의 인연은 그리움을 남기고, 헤어지는 순간의 여운을 남기고, 하지 못한 것들의 후회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