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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찾아온 '탈개인화(depersonalization)'

nanael 2009. 11. 26. 22:31

오늘도 그 순간이 찾아왔다.
그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실연하는 연극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배우처럼 순간 멍해진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게 하나의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떻게든 지금 이 난관을 눈 앞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기계적인 행동을 한 번 더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초 정도 그 상태가 지속된 뒤 안정된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습관과 지각들이 낯설어지는 순간 나는 극도의 우울감을 경험한다. 내가 실제라고 믿고 있던 것들이 다 꿈이라는 것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것이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 명상이라고 생각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탈개인화(depersonalization)'[각주:1]라고 한다. 1세기 전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헤라르드 헤이만스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라기 보다 낯선 꿈처럼 느껴지는 현상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
"이럴 때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방은 기계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우리 자신의 목소리조차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게 들리며, 우리가 실제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말을 수동적인 관찰자처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각주:2]

그리고 이 현상은 어느 시점의 상황이 낯익게 느껴지는 데자뷰 현상, 친숙한 단어가 갑자기 "이상하고, 낯설고, 아무 의미 없는 소리나 글자의 결합체처럼" 느껴지는 '단어 소외(word alienation)'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 세가지 현상은 모두 "집중력이 떨어지고 정신적 에너지가 감소했을 때" 나타나며, 탈개인화의 경우 이로 인해 "연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서 ... 모든 것이 친숙한 느낌을 잃어버린 현상"이다. 그리고 데자뷰나 탈개인화 현상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기분 변화가 뚜렷하며, 작업 리듬이 불규칙한 것이 그것이다.

1세기 전의 설명이라, 뇌과학적 근거는 충분치 않지만, 통계를 바탕으로 한 상황적 근거는 충분하다.

나는 자주 탈개인화 상태를 겪는데, 한 번은 거울을 보는 순간 이 상태에 빠져 카페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 현상은 정말로 정신적 에너지가 감소해서 나타나는 현상일까. '자아'가 순간적으로 우르르 무너지고, 모든 것이 허무해진다. 가족마저 낯설어질 때는 무섭기도 하다.

  1. 여기서 말하는 '탈개인화'은 개인이 집단정체성으로 함몰되는 것을 의미하는 '탈개인화(deindivisuating)'와는 다른 개념이다. [본문으로]
  2. 다우베 드라이스마(김승욱 역),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에코리브르, 에서 재인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