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번짐', 장석남
nanael
2009. 3. 15. 22:36
'번짐'이라는 시가 있다.
'낭독의 발견'이었나, 그런 프로그램에서 어느 시인이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심상이 나에게 번졌다.
'장석남' 시인의 시다.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희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태양은 번져 노을이 되고
노을은 번져 어둠이 된다
사랑은 번져 고요가 되고
슬픔은 번져 시가 된다
번지는 것은 액체의 이미지다
색을 담은 액체의 이미지다
그 번짐이 좋다
번지는 것은 옅어지는 소멸 전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질량은 보존되고, 그 퍼져버린 존재는 다른 무엇인가에 녹아든다.
그 이미지가 좋다
목련은 번져 진달래가 되고
진달래는 번져 벚꽃이 된다
져버린 것은 잊혀져버렸을 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어딘가로 끝없이 번져가며
색을 전이시킨다
번지는 것은 물질과 에너지의 방향이다
우주는 번지고 번져 열죽음 상태에 이를 것이다
나도 언젠간 번져 죽음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그 전에 나에게서 번져간 기억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시간은 번져 각자의 기억이 되지만
기억은 번져 그 시간을 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