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테이아 1 (물 한 컵)
물 한 컵이 내 신체와 모니터 사이에 놓여 있다. '물 한 컵'이란 단어는 물이 담겨 있는 '컵'을 가리키는 말도 컵에 담겨 있는 '물'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거기에는 마신다는 행위가 들어가 있으며 그것은 물과 컵 그 존재 자체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컵이라는 존재는 쉽게 형상화되지만 물이라는 존재는 그렇지 않다. 물은 무엇인가에 놓여진 장소가 중요하고, 담겨 있는 그릇이 중요하고, 그 자체만으로는 형상화할 수 없다. 그래서 물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물을 담는 그릇이 필요하거나(지형도 그릇의 하나다), 물을 마신다는 행위가 필요하다. 나는 물을 마신다는 행위를 하기 위해 떠다 놓은 물을 컵을 기울여 들여다본다. 내 손 끝에 전달되는 딱딱하지만 따뜻한 사기의 느낌과 물을 기울이며 손 끝에 가해지는 압력과 출렁이는 물을 들여다보는 내 자신을 본다. 그리고 위 문장을 쓰기 위해 컵을 다시 내려 놓는다. 방금 마신 물은 오줌을 눌 때까지 의식하지 못한다. 육체라는 그릇에 담겨진 물은 그 존재를 형상화할 수 없다. 물의 형상화라는 것이 얼마나 의존적인 것임을 알게 한다. 나는 먼 바다 깊숙한 물조차 형상화 할 수 없다. 지도 속에 그려진 파란색으로 형상화 되거나, 어느 영화에서 본 심해의 이미지로 대체되거나, 심해의 물고기들을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배경으로밖에 그릴 수 없다. 그 물은 분명 먼 심해에 존재하지만, 나는 그것을 형상화 할 수 없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모습을 알 수조차 없다. 결국 골이 패여진 지구의 지형을 떠올리고, 거기에 곱게 해면을 이룬 물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그릇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만 형상화할 수 없고, 상상 속의 이미지로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 상상 속의 이미지조차 화학책에서 보았던 물분자의 이미지 그 이상을 넘어 갈 수 없다. 심해를 상상하는 한가지 방법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것이 몸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목을 타고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쉽게 형상화되던 물이 더 이상 형상화되지 않는 그 순간의 물에 대한 느낌은 먼 심해 속 물을 생각하는 것과 인식 상으로 동일하다.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