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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대한 잡상들

nanael 2008. 3. 19. 22:35
1. 자연적인 명상이든, 인위적인 명상이든, 그 시간 뒤에는 마음이 정리되고 정갈해지는 기분이다. 명상의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무심한 상태라 어떤 상태라고 딱히 말할 수가 없는데, 결국, 명상일 때의 기분은 명상이 끝난 뒤에야 알 수 있다. 모순인 것이 그 상태는 이미 자아가 다시 돌아온 상태라 결코 명상일 때의 기분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명상의 목적이 명상 이후에 명상이 아닌 상태를 위한 것이라면, 자아가 사라지는 명상이 자아를 위한 것이 되고, 자아라는 허상을 깨달으려면 자아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2. 흔히 깨달았다고 하는 상태, 부처, 오쇼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등이 다다른 상태에 닿으려면 명상이 필요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행하는 명상이 마일리지처럼 쌓이면서 깨달음의 상태에 점점 다가가며 그 양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상전이가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깨달으면 깨달은 것이고, 아니면 아닌 두 가지 상태밖에 없고, 명상을 한 총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깨달을 수 있는 상태에서 다른 기작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오쇼 라즈니쉬는 이상한 말을 했는데, 45분 이상 명상인 상태로 있으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오쇼의 말이 맞았다면 명상을 한 총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한번 명상을 했을 때의 그 지속 시간이 중요하고, 지속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명상 상태에 의식적으로 있으려 하는 수련이 수반된다는 절충을 찾을 수 있다.

3. '깨달은 상태'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건 깨달은 자만 알 수 있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추측해볼 수는 있다. 본인의 추측은 우선 명상이라는 것은 자아의 공허함을 인지한 상태이거나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데, 그 순간 자체가 사실은 깨달았을 때의 상태와 같은 것이고, 명상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데, '깨달았다'고 하는 그 상태는 매 순간 자아를 의식할 수 있는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자아의 공허함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상태는 on, off 밖에 없고, 깨달은 것은 on 상태일 때가 절대 다량을 차지하는 상태라고 혼자 추측하고 있다. 그러니 덜 깨어있는 사람이 있고, 더 깨어있는 사람이 있다기보다는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 명상 뒤에는 보통 새로운 생각 등의 영감이 잘 떠오른다. 나 혼자만의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성급하게 일반화부터 하겠다. 왜 그런지를 이런 저런 시나리오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처음엔 명상을 하고 있을 때는 잡생각이 없는 상태이니까 에너지가 응축될 수 있고, 나중에 응축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면서 영감이 떠오르는 건 아닐까 하는 에너지공급 보존의 법칙을 생각하다가, 뒤에는 그냥 단순히 일상적인 잡생각과의 일시적 단절이 신선한 자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익숙한 곳에서는 익숙한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까, 평소의 잡생각의 흐름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수가 없는 건 당연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명상이 일상화 된다면 더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건가. 내가 워낙 가끔 명상 상태를 겪으니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명상활동이 정말로 뇌를 고차원의 상태로 바꾸는 것인가. 고차원이 무엇인지 정의도 하지 않고, 이 무슨 사이비 과학 같은 말인가 싶지만, 사이비 과학 같은 말 맞고. 사실 모르겠다. 실제로 영감을 가져다주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확실히 시인들한테는 명상이 없으면 시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긴 한데, 주위에 시 쓰는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