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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씨 고약한 놈 - 나의 무의식적 전략

nanael 2008. 1. 3. 10:12
진화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행동하나하나가 전략으로 보인다. 비록 그것이 실질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는 아닐지랄도,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가져다주는 이점이 지금까지 그 행동양식이 존재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하나 그 행동의 이점을 따지는 것은 그리 좋은 습관이 아니다. 그런데 누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진화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그리고 나는 어떤 전략을 택하는가, 나는 왜 이 모양일까를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이기적유전자'에서는 특정 전략들의 진화 양상을 주로 게임이론을 써서 설명을 한다.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는 챕터에서는 전체가 게임이론에 대한 설명이다.(아직 그 챕터를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 챕터의 전반부의 주된 내용은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에 관해서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야 워낙에 유명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책에 나온 게임은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인데, 각 상대편과 한방승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횟수 만큼(혹은 임의의 수만큼) 반복해서 점수를(혹은 특정 전략의 개체수의 증감을) 계산한다. 다수의 경기를 펼치는 만큼 다양한 전략들이 등장할 수 있다. 일단 협력하고 상대방이 배신하면 그 때부터 배신하는 전략, 상대방의 앞의 패만 무조건 따라가는 전략, 계속 협력해주다가 한번씩 배신하는 전략,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교묘한 전략들도 가능하다.

물론 위의 각 전략들을 각 개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시킬 수는 없다. 한 개인도 여러가지 전략을 사람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혼합적으로 사용하고, 협력과 배신 이외에 다양한 수준의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이론은 현실에 대한 통찰을 줄 수 있다.

그럼 나는 어떤 전략을 택해왔는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한 전략을 쓰고 있었다. 진화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니 의식도 하지 않았던 대인 전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제 사회에서는 배신이라는 극단적인 전략은 거의 쓰지 않는다. 협력 또한 '같이 힘을 합해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버리면 현실에서 그리 적용되는 순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예의 이상의 호의를 베푸는 것' 혹은 '호감을 말이나, 재화 등으로 표현하는 것(예를 들어 생일 챙겨주기)'을 협력이라고 두고, 특별한 호의나 호감을 표현하지 않는 것을 그 반대의 전략이라고 하자.

나의 큰 범주에서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 (항상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이다.)

1. 먼저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2. 상대방이 먼저 호의를 베풀면 사정이 되는한 반드시 갚는다.
3. 매우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는 가끔 먼저 호의를 베푼다.
4. 그 호의에 대한 보답이 없거나 오히려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일 때는,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며 일정정도 계속 호의를 베푼다.
5. 마음에 담아둔 불편한 감정이 내 자신의 호감을 넘어설 정도로 쌓이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냉대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사람 사이의 교류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다. 말도 별로 없고(말보단 글을 좋아한다), 그 때문인지 약간의 대인기피증도 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하지도 못할 뿐더러 원하지도 않는다. 극소수의 사람과만 지속적인 연락과 교우를 나눌 뿐이다. 먼저 호의를 베풀지 않는 것도 그런 내 성향에 딱 들어맞게 적응된 것이다. 그리고 다름사람에게 절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 내가 받은 호의는 되도록 그 이상으로 갚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섭섭한 일이 있으면 툭툭 그것에 관해 말을 던지고, 그래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저금통에 동전 넣듯 쌓아둔다. 그러다 한계치를 넘어가면 저금통을 깨버리듯, 참지 못하고 나도 막 대한다.

주석을 달자면 위에 설명한 전략은 아주 많이 친해지지 않았을 때, 비교적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할 때의 경우이다. 일단 아주 많이 친해지게 되면 위에 설명한 전략이랑 아무 상관없이 대한다.

위의 전략의 사회 속에서의 '적합성'은 어느정도일까. 이 적합성이란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어 애매하지만, 일단은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의 수로 정의하자. 딱 봐도 알겠지만 내가 나도 모르게 쓰는 전략은 적합성의 측면에선 최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리 좋은 점수를 얻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왕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있는 김에 그 책에 나오는 설명을 바탕으로 내 전략을 분석해보자.

각각의 전략들은 다양한 패턴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처음엔 무조건 두번 협력했다가,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의 반응을 따라가다가, 이유없이 한 번 배신을 해주고, 또 두 번 협력하는 식의 전략도 가능하다. 무수히 많은 전략들이 가능하지만 그 전략들 중 쓸모있는 것만 추려낸다면, 아마 그들에게서 공통되는 특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예외는 제외하고 말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득점을 올릴 수 있는 전략 중 두가지를 예로 든다. 그 두가지는 각각 '마음씨 좋은놈 전략 -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는 무조건 협력부터 한다.'과 '관용 전략 - 예전에 배신했던 기억은 있고 최근의 일만 기억한다.'이다. 이 두가지는 죄수의 딜레마 대회에서 상위권에 속한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취하고 있던 전략이다.

'마음씨 좋은놈 전략'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일단 협력을 하는 것이 친구를 만들기 좋기 때문에 점수를 얻기 유리하다. 설사 처음 만난 상대가 처음부터 배신을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한번이든 계속이든 배신을 하면 된다. 물론 이 전략이 통하려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똑같이 마음씨 좋은놈 전략을 쓰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내 전략은 '마음씨 좋은놈 전략'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겐 호의를 보이기 때문에 먼저 호의를 보이는 전략을 택한다면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먼저 호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놓치게 된다.

'관용 전략'의 유리함에 담긴 뜻은 단기기억만 가진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바로 앞에 상대방이 어떤 카드를 냈는지만 보고 평가하는 것이, 오래 전에 배신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것이다. '마음씨 좋은놈 전략'을 가진 두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자. 한 프로그램은 마음씨는 좋아 처음에는 협력하지만 상대방이 어쩌다 한번 배신을 하면 상처를 많이 받고 다시는 그 상대에게 협력하지 않는다. 다른 프로그램은 상대방이 잘 나가다 배신을 하면 바로 자신도 다음 턴에 배신을 내지만, 그 턴에 다시 상대방이 협력을 한다면 다시 협력으로 돌아선다. 즉, 상대방의 이전 패와 똑같은 패를 다음 턴에서 낸다. '관용 전략'을 취한 쪽은 후자이고, 경기에서 고득점을 하는 프로그램도 후자이다. 한 두번 배신한 것 가지고 꿍하면 결국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나의 전략은 어떠한가. 나의 전략은 '관용 전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조금 특이한데, 상대방이 배신을 해도 몇 번 협력을 하다가, 그 배신 갯수가 쌓이다가 일정수가 넘어버리면 오반칙 퇴장처럼 더이상 그 사람과 협력하지 않는 모양새이다. 일반적으로는 상대방이 먼저 배신을 하면 바로 다음턴에 배신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대부분이 호의에 대해 호의로 보답하는 전략들의 풀(pool)에서 처음 호의에 배신으로 응답한다는 것은 나에게 비호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호의를 보이는 상대는 내가 친해지고 싶은 상대이기 때문에, 친해졌을 때 얻을 수 있는 점수가 높아서 쉽게 나도 배신으로 맞받아치지 못하는 형국이다. 혹시나 내가 친해지고 싶은 상대방은 다른 상대방이 연속해서 호의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호의로 답하지 않는 전략을 쓰는 것일까 하는 기대를 가질 수도 있다(이건 내가 다수의 빈도로 쓰는 전략이기도 하다). 혹은 여러번 배신에 호의로 보답하면 감동받아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관찰과정에서 연속된 배신을 통해 많은 상처를 받고, 상대방에게 나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피드백을 못 시켜주기 때문에, 상대방은 계속 배신할 확률이 높고 그렇기에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가 배신할 확률을 높였으면서, 상대방이 연속해서 배신을 하면 관용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혼자 꿍하면 자기한테 이로울게 없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쓰던 대인관계 전략은 이렇다. 일반적인 설명으로도 그리 좋은 전략은 아니다. 나도 십분 공감하지만, 어떻게 프로그래밍 된 것인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과 부대끼기보다는 편한사람과 더 많이 보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사실 사는데 큰 무리는 없다. 그런데 가끔 소외감에 사무칠 때가 있다.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호의를 보이는 빈도를 늘려볼까도 생각 중이다. 결국 다시 평형점을 찾아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