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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글이다 3 - '양'과 '질'의 변환, 공감각, 그리고 '상'들의 세계
nanael
2009. 2. 20. 17:28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두꺼운 파카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비니로 귀를 가리고, 눈과 코만 공기밖으로 내민채 그렇게 물 속에 사는 파충류처럼 거리를 마주합니다. 저는 짜리몽땅한 키 때문에 코트 따위는 엄두도 못 내고 파카를 즐겨 입습니다.
훈련소에서는 깔깔이를 즐겨입었습니다. 4월에 입대했지만, 꽤나 쌀쌀했던데다, 원래 추위를 잘 못 참아 거의 항상 입고 있었습니다. 깔깔이를 입으면서 이건 왜 이렇게 따뜻할까 궁금했습니다. 누빈 표면이 보온성을 높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깔깔이든 파카든 스스로 열을 내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따뜻한 옷도 (열판이 달려있지 않는한) 열을 직접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몸에서 나오는 열을 '보온'할 뿐입니다.
깔깔이를 입으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는 열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해 질 수 있고 여태까지 그래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옷이 따뜻한 게 아니라, 우리 몸이 따뜻한 것이라는 사실을.
더 생각을 전개하면 '좋은생각'에 나올법한 글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착한 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니었고, 그냥 자신의 따뜻함을 믿고 보온 잘 하라는 맹랑한 의미였습니다. 세상에 본질적으로 차가운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내는 열을 볼 수 없습니다. 시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빛을 스스로 내는 건 지구에서 보기란 정말 힘듭니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고, 나머지 행성과 달은 그 빛을 반사할 뿐인 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구상의 자연물들은 대부분 흡수하지 않은 빛을 거부(반사)함으로써 자신의 색깔을 가진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지구상에 스스로 빛을 내는 건, TV, 모니터, 형광등, 촛불, 반딧불이 정도지 않겠습니까. 나머지는 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우리몸은 대신 적외선의 형태로 빛을 내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적외선은 비가시광선이라 볼 수는 없지만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파장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여 어디가 온도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일종의 역변환입니다. 물리학에서 빛은 그냥 전자기파일 뿐이고, 색깔은 파장(진동수)일 뿐입니다. 색깔을 지각하는 질적인 차이를 양적인 숫자로 변환을 해야지 물리적으로 의미있는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외선 카메라는 그 역입니다. 파장이라는 양을 색이라는 질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가 지각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첫번째 그림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마티스는 색체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실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색채를 모방하지 않고, 쉽게 말해 지 맘대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저 색채들 조화롭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색감 자체도 이쁘고 말입니다.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색채의 표현은 피카소의 형태 해방과 함께 현대 예술의 혁명적인 변화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다시 보겠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보고 생각한 것은 미묘한 명암의 차이를 색채를 달리하여 표현한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건 재쳐두고 얼굴만 보겠습니다. 마구잡이로 색칠을 덧칠한 것이 아니라, 선이 느껴집니다. 눈 코 입 굴곡 때문에 생기는 명암의 차이마다 색깔을 달리합니다. 명암은 양적인 변화입니다. 모니터 화면을 변경하듯 1부터 99까지 선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양입니다. 반면 색깔은 질입니다. 모니터에서는 삼원색을 1~99까지 변화시켜가며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만(심지어 실제 우리 감각도 비슷한 원리로 색을 느끼지만), 지각하는 '색'은 질적 차이입니다.
양적인 차이에 질적인 차이를 부여하는 것, 항상 질적인 차이를 양적으로 환원시켜 문제를 푸는 물리를 공부한 저로서는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암산을 비정상적으로 잘하거나(145412 곱하기 789684 를 1분도 안 되서 계산을 한다던지),
날짜 계산을 천재적으로 잘하거나(서기 2355년 1월 13일은 무슨 요일? 하면 5초도 안 되서 답을 내는 사람들)
암기력이 기가 막히게 좋은 사람들(무작위로 써놓은 엄청나게 긴 수식을 10년이 지나도 막힘없이 대답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계산 방식이나 암기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엄청난 암기력으로 여러 경우를 다 기억해 두었다가 계산에 바로바로 써먹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숫자를 숫자로 보지 않고 다른 것으로 연상합니다. 1을 보면 할머니의 지팡이, 2는 신천에서 실성한 오리, 3을 보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풍만한 가슴 같은 식으로 다른 무엇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상이 그들의 암기력의 비결입니다.
절대적 암기력의 소유자들은 보통 자폐아인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익숙해지면 숫자를 바로 이미지화 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타짜'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숫자 7을 보면 자동적으로 멧돼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절대적 암기력의 소유자들은 아주 긴 수식을 스토리를 만들어 외웁니다.
타짜를 예로 들면 7563이라는 숫자를 "멧돼지가 난초 화분으로 뛰어 들려다 장미가시에 찔려 죽어 벚꽃이 되었다"라는 스토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7563은 매우 간단한 수식이지만, 각종 수식 기호가 들어간 아주 긴 문장도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어서 외웁니다. (화투패는 1월부터 12월까지 각 달을 상징하는 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서 말한 건 숫자라는 의미 기호에서 이미지로의 연상이지만 어떤 절대적 암기력의 소유자는 숫자를 보고, 다른 감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31을 보면 찢어질 듯한 쇳소리가 느껴지고, 인테그랄 기호를 보면 청국장 냄새가 나고 하는 식입니다. 시각적인 숫자를 공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인데, 이 또한 절대적 기억력의 비결 중 하나입니다.
시각에서 청각을 느끼고, 청각에서 후각을 느끼고, 후각에서 부드러웠던 촉감을 느끼는 공감각.
'칸딘스키'라는 화가는 심지어 회화로 음악을 표현하였습니다. 음악에 대응되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 뒤 그것들을 합쳐 회화로 음악을 표현합니다. 두번째 그림이 바로 '칸딘스키'의 '컴포지션'입니다. 음악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못 느끼겠지만 예민한 사람은 느낀답니다.
그림을 다 감상하셨으면 이제 조금 대화의 범위를 넓혀서 추상적인 얘기를 하겠습니다.
음악세계, 즉, 청각적인 '상'들이 널려있는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시각 이미지들이 널려있는 하나의 지형을 떠올립니다.
과학적 지식들이 널려 있는 세계.
다양한 육체적 쾌락이 널려 있는 세계.
경영학적 지식이 펼쳐진 세계.
미적 기호들이 널린 세계
그 외 다른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를 모두 상상해봅시다.
질적이고 양적인 분포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각각의 세계를 하나의 형태로 단순화시킵니다.
기하학적 형태일 수도 있고, 점과 선으로 된 네트워크일수도 있고, 등고선처럼 수치가 매겨진 지형일 수도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색을 진동수로 환원하듯 환원시킵니다.
그렇게 모든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형태로 다 환원시키면 우리는 각 세계를 연결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비교하여 비슷한 모양의 것들은 묶어버립니다. 반대되는 것을 묶기도 하고, 마구잡이로 연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단순화된 '상'들을 연결시킨 뒤 우리는 다시 양적인 것에 질적인 것을 부여합니다.
그럼 두 감각이 연결된 공감각이 탄생하게 됩니다. 단순히 감각이 결합된 공감각이 아니라, 모든 지식, 모든 기억들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연상시키는 세상을 만들어냅니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에서는 이를 '유리알의 유희'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세계을 인지할 것이라 추측됩니다. 온갖 지식과 형상을 각각의 뉴런들이 따로 나눠서 저장할 수는 없습니다. 똑같은 뉴런들이 결합과 점화 순서를 달리하여 정보를 저장할 것인데, 그 때 앞서 말한 환원된 뉴런의 지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때 유사한 것들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비슷한 결합과 점화 형식을 가질 것입니다. 공감각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그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시는 공감각의 언어입니다. 공감각적 표현(예를 들어 "아침 햇살이 내 몸을 적실 때")을 들을 때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들은 비슷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던 뉴런들을 동시에 자극시킬 때 오는 흥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단순화된 '상'과 '상'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세계, 그들을 이리저리 연결해가며 공감각과 연상을 일으키는 시(詩)적 세계. 영감을 수신하는 정신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런 시적세계의 모습일 것입니다.
참고
진중권, 미학오디세이 1, 2, 휴머니스트
훈련소에서는 깔깔이를 즐겨입었습니다. 4월에 입대했지만, 꽤나 쌀쌀했던데다, 원래 추위를 잘 못 참아 거의 항상 입고 있었습니다. 깔깔이를 입으면서 이건 왜 이렇게 따뜻할까 궁금했습니다. 누빈 표면이 보온성을 높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깔깔이든 파카든 스스로 열을 내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따뜻한 옷도 (열판이 달려있지 않는한) 열을 직접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몸에서 나오는 열을 '보온'할 뿐입니다.
깔깔이를 입으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는 열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해 질 수 있고 여태까지 그래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옷이 따뜻한 게 아니라, 우리 몸이 따뜻한 것이라는 사실을.
더 생각을 전개하면 '좋은생각'에 나올법한 글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착한 말을 하려 했던 건 아니었고, 그냥 자신의 따뜻함을 믿고 보온 잘 하라는 맹랑한 의미였습니다. 세상에 본질적으로 차가운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내는 열을 볼 수 없습니다. 시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빛을 스스로 내는 건 지구에서 보기란 정말 힘듭니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고, 나머지 행성과 달은 그 빛을 반사할 뿐인 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구상의 자연물들은 대부분 흡수하지 않은 빛을 거부(반사)함으로써 자신의 색깔을 가진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지구상에 스스로 빛을 내는 건, TV, 모니터, 형광등, 촛불, 반딧불이 정도지 않겠습니까. 나머지는 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우리몸은 대신 적외선의 형태로 빛을 내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적외선은 비가시광선이라 볼 수는 없지만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파장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여 어디가 온도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일종의 역변환입니다. 물리학에서 빛은 그냥 전자기파일 뿐이고, 색깔은 파장(진동수)일 뿐입니다. 색깔을 지각하는 질적인 차이를 양적인 숫자로 변환을 해야지 물리적으로 의미있는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외선 카메라는 그 역입니다. 파장이라는 양을 색이라는 질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가 지각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첫번째 그림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마티스는 색체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실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색채를 모방하지 않고, 쉽게 말해 지 맘대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저 색채들 조화롭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색감 자체도 이쁘고 말입니다.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색채의 표현은 피카소의 형태 해방과 함께 현대 예술의 혁명적인 변화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다시 보겠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보고 생각한 것은 미묘한 명암의 차이를 색채를 달리하여 표현한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건 재쳐두고 얼굴만 보겠습니다. 마구잡이로 색칠을 덧칠한 것이 아니라, 선이 느껴집니다. 눈 코 입 굴곡 때문에 생기는 명암의 차이마다 색깔을 달리합니다. 명암은 양적인 변화입니다. 모니터 화면을 변경하듯 1부터 99까지 선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양입니다. 반면 색깔은 질입니다. 모니터에서는 삼원색을 1~99까지 변화시켜가며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만(심지어 실제 우리 감각도 비슷한 원리로 색을 느끼지만), 지각하는 '색'은 질적 차이입니다.
양적인 차이에 질적인 차이를 부여하는 것, 항상 질적인 차이를 양적으로 환원시켜 문제를 푸는 물리를 공부한 저로서는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암산을 비정상적으로 잘하거나(145412 곱하기 789684 를 1분도 안 되서 계산을 한다던지),
날짜 계산을 천재적으로 잘하거나(서기 2355년 1월 13일은 무슨 요일? 하면 5초도 안 되서 답을 내는 사람들)
암기력이 기가 막히게 좋은 사람들(무작위로 써놓은 엄청나게 긴 수식을 10년이 지나도 막힘없이 대답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계산 방식이나 암기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엄청난 암기력으로 여러 경우를 다 기억해 두었다가 계산에 바로바로 써먹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숫자를 숫자로 보지 않고 다른 것으로 연상합니다. 1을 보면 할머니의 지팡이, 2는 신천에서 실성한 오리, 3을 보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풍만한 가슴 같은 식으로 다른 무엇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상이 그들의 암기력의 비결입니다.
절대적 암기력의 소유자들은 보통 자폐아인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익숙해지면 숫자를 바로 이미지화 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타짜'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숫자 7을 보면 자동적으로 멧돼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절대적 암기력의 소유자들은 아주 긴 수식을 스토리를 만들어 외웁니다.
타짜를 예로 들면 7563이라는 숫자를 "멧돼지가 난초 화분으로 뛰어 들려다 장미가시에 찔려 죽어 벚꽃이 되었다"라는 스토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7563은 매우 간단한 수식이지만, 각종 수식 기호가 들어간 아주 긴 문장도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어서 외웁니다. (화투패는 1월부터 12월까지 각 달을 상징하는 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서 말한 건 숫자라는 의미 기호에서 이미지로의 연상이지만 어떤 절대적 암기력의 소유자는 숫자를 보고, 다른 감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31을 보면 찢어질 듯한 쇳소리가 느껴지고, 인테그랄 기호를 보면 청국장 냄새가 나고 하는 식입니다. 시각적인 숫자를 공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인데, 이 또한 절대적 기억력의 비결 중 하나입니다.
시각에서 청각을 느끼고, 청각에서 후각을 느끼고, 후각에서 부드러웠던 촉감을 느끼는 공감각.
'칸딘스키'라는 화가는 심지어 회화로 음악을 표현하였습니다. 음악에 대응되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 뒤 그것들을 합쳐 회화로 음악을 표현합니다. 두번째 그림이 바로 '칸딘스키'의 '컴포지션'입니다. 음악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못 느끼겠지만 예민한 사람은 느낀답니다.
그림을 다 감상하셨으면 이제 조금 대화의 범위를 넓혀서 추상적인 얘기를 하겠습니다.
음악세계, 즉, 청각적인 '상'들이 널려있는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시각 이미지들이 널려있는 하나의 지형을 떠올립니다.
과학적 지식들이 널려 있는 세계.
다양한 육체적 쾌락이 널려 있는 세계.
경영학적 지식이 펼쳐진 세계.
미적 기호들이 널린 세계
그 외 다른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를 모두 상상해봅시다.
질적이고 양적인 분포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각각의 세계를 하나의 형태로 단순화시킵니다.
기하학적 형태일 수도 있고, 점과 선으로 된 네트워크일수도 있고, 등고선처럼 수치가 매겨진 지형일 수도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색을 진동수로 환원하듯 환원시킵니다.
그렇게 모든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형태로 다 환원시키면 우리는 각 세계를 연결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비교하여 비슷한 모양의 것들은 묶어버립니다. 반대되는 것을 묶기도 하고, 마구잡이로 연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단순화된 '상'들을 연결시킨 뒤 우리는 다시 양적인 것에 질적인 것을 부여합니다.
그럼 두 감각이 연결된 공감각이 탄생하게 됩니다. 단순히 감각이 결합된 공감각이 아니라, 모든 지식, 모든 기억들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연상시키는 세상을 만들어냅니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에서는 이를 '유리알의 유희'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세계을 인지할 것이라 추측됩니다. 온갖 지식과 형상을 각각의 뉴런들이 따로 나눠서 저장할 수는 없습니다. 똑같은 뉴런들이 결합과 점화 순서를 달리하여 정보를 저장할 것인데, 그 때 앞서 말한 환원된 뉴런의 지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때 유사한 것들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비슷한 결합과 점화 형식을 가질 것입니다. 공감각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그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시는 공감각의 언어입니다. 공감각적 표현(예를 들어 "아침 햇살이 내 몸을 적실 때")을 들을 때 느끼는 아름다운 감정들은 비슷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던 뉴런들을 동시에 자극시킬 때 오는 흥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단순화된 '상'과 '상'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세계, 그들을 이리저리 연결해가며 공감각과 연상을 일으키는 시(詩)적 세계. 영감을 수신하는 정신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런 시적세계의 모습일 것입니다.
참고
진중권, 미학오디세이 1, 2,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