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공간으로부터 침전되는 (사유의) 감수성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시리즈의 서두의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래도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서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에셔와 마그리트의 작품들로 절들을 소개한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으로 시간을 넘나드는 논쟁, 구어체로 쓰인 문체와, 작품에서 작품들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그 연결고리들을 빼놓고 그 책을 말 할 수 있을까.
형식은 내용이 쏙쏙 들어오게 '돕는' 역할을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전히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첨부되는" 것이다. 형식 그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짜 중요한 내용이고, 핵심일지 모른다(말하고자고 하는 것이 없는 형식까지 포함하여).
이러한 형식이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생활과 삶의 영역에서 침전된다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 건축일 것이다. 건축은 형식을 통해 말한다. 만약 어떤 건물이 공연을 위한 건물이라면, 그 건물 안에서 어떤 공연이 열렸든, 그 내용에 상관없이 시간 속에 침전되는 의미 혹은 아우라가 있다. 만약 그 건물이 미술관이라면, 미술관의 외관과 내관은 물론이고 그 동선 속에 어떤 미술작품이 걸리는가에 상관없는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그 자체로 '주제'가 생기는 것이다. 만약 또 다른 건물이 생활을 위한 주거공간이었다면, 거기에서 산 사람들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그 외관과 내부 양식들이 자신들에게 조금씩 스며든다. 그것은 그 사람의 습관적 사고에 스며들 수도 있고, 신체 속에 반영될 수도 있고, 그 안에서 같이 사는 타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일상적 주거공간에서의 생활이 어떤 '말할 가치'가 침전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무엇인가가 침전되는 것은 확실하다.)
조금 더 공간을 넓힌다면, 건축물 뿐 아니라, 조경, 길, 공간 배치 등도 무엇인가를 침전시킨다. 이것은 진중권이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을 형식 속에 침전시키고, 그것을 보는 독자가 다시 그 형식 속에서 그것을 발견 혹은 느끼듯이, 공간을 만든 사람의 의도(설사 의도가 없더라도)에 따라 (그것이 만약 공적인 장소라면) 집단의 평균적인 사고양식에 그 공간의 양식이 침전될 것이다. 이는 개개인에게 평균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더 많은 시간이 쌓인다면 '집단의 성향'이라는 이름으로 고형물이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은 물론 건물이나 공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 양식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어딜 가나 특정한 공간의 형태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건축 혹은 (자연적, 인공적) 공간이 주는 형식의 영향은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아래는 우석훈의 '직선들의 대한민국' 134페이지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의 높은 도시 빈민의 비율에도 불구하고, 도시 빈민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문화가 없는 이유를 도시 미학의 공간에 갇혀버린 예술가들을 통해 설명한 것이다.
예술은 물론 공간을 뛰어 넘어 상상을 통해 창작된다. 그러나 '내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한 적도 없었다면, 그 공간에 관한 혹은 그 공간까지 아우르는 상상은 태동할 수도 없다. 사유가 공간에 갇힌다면 조금 심한 말이지만, 공간이 사유의 뱡향에 중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사는 곳은 아파트 촌이다. 집이 좁은 편이지만 사는 동네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곳이다. 아파트는 마당 대신 주차장이 있고, 옥상 대신 베란다가 있다. 흙은 화분 속에만 '담겨' 있다. 밖으로 나가면 온통이 아파트로 병풍이 쳐져있고, 하늘은 그만큼 좁아져있다. 사방이 막혀있는 그 곳에선 무언가 항상 답답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공간에서 10년 20년 산다면 나의 사유는 어떻게 방향을 잡을까. 이런 아파트들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이미 어딜가나 고층 아파트들을 안 보기가 힘들다. 개성이라곤 전혀 없이 높기만 하다. 처음 고층 아파트를 볼 때는 아찔하기라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는 한국 어린이들의 평균적 감수성은 어떻게 형성 될까.
사유를 하는 물리적인 공간, 뇌만 식염수 통에 들어가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물리적인 공간은 단순히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이 아니다. 형식과 조형으로부터 조금씩 스며받는 감수성은 사유가 되어 드러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소설이 펼쳐지는 공간이 필요하다. 반드시 머리 속에 혹은 그림으로 그려 놓아야 한다. 그것을 공간적 배경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공간은 사유의 배경이다. 그 사유가 쌓여 공간으로 다시 드러나고, 그 공간 속에 다시 사유들이 쌓인다.
내 사유의 한계를 공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 집단적 감수성에 대해 느끼는 답답함에서 요즘 들어 건축물과 조형 공간들에 관심이 가는 중이다.
*덧글
나는 이공계학과만 있는 공과대학에 다닌다. 건축학을 학부로 나온 소흥렬 당시 철학 교수는 학교의 획일적인 건물에 대해 개탄을 하신 적이 있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에서의 이성을 표현한다는 이유로 각지게 지었다지만, 모든 건물을 다 똑깥은 디자인으로 만든 것은 정말 촌스럽기 그지없다. 워낙의 소규모 학교라 어쩔 수 없이 통일 되게 지었다고 해도 그 자체가 예쁘지도 않다. 그렇다고 과학 이성의 힘이 느껴지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냥 삭막할 뿐이다. 과학을 공부하는 건물은 이성적이고 딱딱해야 한다는 촌스러운 편견이다. 그리고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대학의 건물과 산학 연구기관의 건물까지 통일 시킨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물론 건물 때문에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변명이다. 과학 연구에는 건물의 무의식적 영향이 덜하기는 하다. 그런데 예술에서는 어떨까. 혹은 예술과 결합해야 하는 기술 분야는 어떨까. 예술에는 전혀 관심없어 보이는 공과대학이라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글에 언급된 도서